떠도는 돈 그림앞에 줄섰다
by조선일보 기자
2006.10.18 08:27:21
지위상승 느낌에 투자 가치는 덤 낙찰 작품 71%가 1000만원 아래 그림
CATV·위성방송선 경매 ‘안방 생중계’
[조선일보 제공] 그림 판매액은 작년의 3.5배, 관람객 수는 1.7배. 전국 화랑 117개가 모인 화랑협회가 지난달 말 개최한 아트페어 결과다. 아트페어는 화랑이 각자 부스를 차리고 합동으로 작품을 파는 ‘미술5일장’. 화랑협회가 지난봄에 연 국제아트페어에서도 판매액이 작년보다 1.7배 늘었다. 주식시장이 부진하고 부동산 규제가 심해지자,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부동자금(浮動資金)이 화랑계에 몰리고 있다.
◆뜨거운 경매장 열기
즐거운 비명소리는 경매장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옥션이 지난 9월 28일 경매를 할 땐 한 달 동안 600여명이 새로 회원 가입을 했다. 그 중 100명은 연회비 10만원을 내고 경매 때마다 응찰자격을 갖는 유료회원이었다. K옥션이 대중에게 가까이 가겠다며 9월 14일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서 경매를 했더니, 400명 가까이 몰려와 좌석 180석을 넘치게 채우고 입구 바깥까지 서 있었다. 원래 경매는 누구나 가서 구경을 할 수 있지만, 최근에는 구경꾼 자리도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 이 때문에 서울옥션은 지난달부터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을 통해 경매를 생중계해 집에서 TV를 보면서 전화로 응찰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지방에서 올라오는 손님들도 많아지자 이달 20일엔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첫 ‘출장경매’를 한다.
| |
▲ 지난달 19일 한국화랑협회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연아트페어에선 작년보다 3.5배(금액기준) 많은 그림이 팔렸다. 관람객들이 그림을 둘러보고 있다. | |
|
윤철규 서울옥션 대표는 “평범한 사람들의 70년대 꿈이 TV를 소장하는 것이었고, 80년대 꿈이 자동차를 갖는 것이었다면, 요즘의 꿈은 그림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70% 이상은 1000만원 미만 작품
부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누구나 그림을 한 점 사고 싶어하고, 실제로 살 수 있는 시대다. 서울옥션에서 낙찰된 작품 중 1000만원 미만이 차지한 비중은 2001년 55%에서 2005년에는 71%로 뛰어올랐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 국제미술시장 분석기관인 ‘아트프라이스’의 자료에 따르면 2005년 한 해 동안 국제경매에서 팔린 작품의 83%가 1만 달러 미만이었고, 2000달러 미만인 작품도 56%나 됐다.
100만원 안팎으로 소장할 수 있는 판화와 드로잉의 인기가 오르는 것도 이런 ‘작은손’ 컬렉터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서울옥션의 중저가 경매인 ‘열린경매’의 낙찰률은 2004년 34.2%에서 2006년 9월 현재 58.9%로 확 올랐고, K옥션이 지난 4월 아예 판화와 드로잉만 가지고 경매를 하자 낙찰률은 93.6%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주식처럼 쪽박 찰 수도
사람들은 왜 그림을 살까? 미국잡지 ‘에스콰이어’는 사람들이 그림을 사는 이유에 대해 이미 1970년대에 체계적으로 분석을 한 적이 있다. 첫째, 미술을 통해 내면이 성장하기 때문, 둘째, 투자수익에 대한 기대, 셋째, 사회적인 지위상승의 느낌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림 사는 건 재미있다.
은행에 묻어둔 돈은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술에 묻어둔 돈은 예쁜 그림으로 언제나 내 눈 앞에 걸려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심리적 이자율’이라 표현한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누구나 컬렉터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다만 수십만원, 수백만원으로 그림을 사기 시작하는 작은 손 컬렉터들은 ‘적은 돈으로 큰 돈 벌겠다’는 허황된 기대를 버리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100만원짜리 사서 올라봤자 사고파는 수수료 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큰 돈을 들여도 허무하게 돈을 잃을 수 있는 건 주식투자와 마찬가지다. 한 예로 1994년 뉴욕에서 135만 달러에 경매된 클로드 모네의 유화 ‘앙티브’는 3년 만에 50만 달러가 올라 1997년에 185만 달러에 되팔렸지만, 같은 인상주의 대가인 르누아르의 유화 ‘빨래하는 여인들’은 1993년에 490만 달러에 낙찰됐다가 2005년에 290만 달러로 값이 반토막 났다.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10여 년 만에 200만 달러(20억원)가 날아갔다. 아직 미술시장의 투명한 정보와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예가 더 많다는 것만 잊지 않고 조심한다면, ‘그림쇼핑’은 누구나 시작해 볼 수 있는 유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