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시장의 신뢰를 얻어라

by하수정 기자
2008.03.20 11:15:19

(제3부)금융경쟁력이 살 길이다
금융경쟁력 세계 최하위…"정책에 대한 신뢰가 없다"
말로만 금융허브…"규제완화, 일관성 시의성 떨어져"

[이데일리 하수정기자] "4단계 방카슈랑스가 또 무산되는 겁니까. 시스템 준비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결정해야하는 데 누구 말을 믿어야 합니까."

지난 1월 16일 한 시중은행 방카슈랑스 담당 실무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문의를 해왔다.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4단계 방카슈랑스 이행 중단을 당론으로 정했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는 "4월에 4단계 방카슈랑스를 시행한다는 방침에 변함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정부는 정치권 압박에 두 손 들고 말았다. 은행에서 자동차보험과 종신보험을 판매할 수 있는 4단계 방카슈랑스는 결국 무산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 국정 과제 중 하나가 `금융허브`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역시 `금융허브`를 외쳐왔다. 현재 우리 금융산업의 현실은 어떨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조사한 2006년 세계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의 금융산업 경쟁력은 최하위다. 은행 규제가 금융 경쟁력을 제약하지 않는 정도는 61개국 중 54위, 금융 인력 활용 수준은 꼴찌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성장률은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5.7% 증가했다. 단순 비교하면 미국 3.9%, 영국 5.6%보다 높다. 그러나 국내 총생산(GDP) 성장에서의 기여도를 보면 우리나라는 8.2%로 미국 11.1%, 영국 15.5%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국민은행(060000)과 신한금융(055550)지주, 하나금융지주(086790) 등 국내 주요 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은 60~80%에 달하지만, 국내 은행의 해외영업비중은 2006년 기준으로 평균 3.4%에 불과하다.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선진 금융회사가 없다는 얘기다.
 


이 처럼 금융산업의 경쟁력이 뒤쳐지고 있는 것은 금융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금융정책이 정치 논리에 흔들리면서 시장이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게 금융업계의 불만이다.
 
방카슈랑스가 단적인 예다. 지난 2005년 3년 연기됐던 마지막 4단계 방카슈랑스는 올해도 30만명 보험설계사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입김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석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방카슈랑스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보편화돼있는 제도"라며 "일본은 지난해 말 예정대로 전면 개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미 국제적으로 검증된 제도를 우리나라가 도입하지 않는 것은 금융허브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규제 완화 여부 자체 뿐 아니라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더욱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6년 하반기 달러/원 환율이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를 경신하자 수출기업들은 연일 정부에 외환자유화를 조기 시행해달라고 촉구했다.



그 다음 해인 2007년 초 청와대가 나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고 1월 15일 해외 부동산 투자한도를 300만달러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외환자유화 방안이 발표됐다.

발표 당일, 달러/원 환율은 오르기는 커녕 하락했다. 시장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이미 환율이 가파른 하락 후 반등추세로 접어든 뒤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외 부동산 버블 논란이 제기되면서 해외 부동산 투자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

데이비드 에드워드 SC제일은행장은 지난 1월 9일 이명박 대통령(당시 당선인)과의 금융인 초청 간담회에서 "시장 변화 속도에 맞춰 규제도 변화해야 한다"며 "법률 중심에서 원칙 규제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규제 하나 완화하는데 3년이 걸리고 그 때는 이미 그 규제완화의 효과가 없어져버린다"며 "대부분 규제가 법률에 명시되고 있는데, 개정이 보다 쉬운 시행령이나 규칙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쟁제한 규제개선에 대한 소관부처 의견`이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내부 보고서를 들여다보자.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규제학회의 연구용역 결과 시장 경쟁을 제한하는 52개의 규제개선 과제가 담겼고 이에 대한 각 주무부처의 입장이 적혀 있다.

이미 반영하고 있다는 답변을 포함해 규제 개선을 수용하겠다는 회신은 52개 중 18개로 전체 35%에 불과했다. 금융부문의 경우 금융감독위원회가 2건 모두 불수용했고, 재정경제부 역시 7건 모두 수용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정부부처 관계자는 "하나의 규제에 대해 부처간 입장이 다르고, 이해당사자도 여러 군데이기 때문에 정부내에서의 조율이 쉽지 않다"며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나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이상 수평적 관계의 타부처가 관할 규제를 풀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당국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방향성을 잡기 어려울 때가 많다"며 "정부에서 금융규제를 개선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체감도는 낮다"고 꼬집었다.

지난 1월 이 대통령의 금융인 초청 간담회에서의 리처드 웨커 외환은행장 발언은 현재 한국 정부 정책의 신뢰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외국인 투자자 사이에 한국 정책에 대한 신뢰성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의 규제완화에 대한 의지는 외국인에게는 긍정적인 사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동이 취해져야 진실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한다."

`금융허브`가 꿈이 아닌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