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확대경]농협은행장 전격 사임이 씁쓸한 이유

by유재희 기자
2020.03.05 06:00:00

[이데일리 유재희 기자] “농협중앙회장이 새로 뽑힌 다음부터 경영진이 물갈이 될거란 소문이 돌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어요. 금융지주 계열사인 데다 성과도 좋았잖아요. 새로운 임기를 시작한 지 2개월밖에 안됐고요. 그런데 역시나..”

기자와 만난 한 농협금융 직원의 말이다. 농협금융지주 출범 이후 최초로 3연임(1+1+1년)에 성공했던 이대훈 농협은행장이 새 임기를 시작한 지 만 2개월 만에 사임하면서 금융권에선 뒷얘기가 무성하다. 농협금융 측은 지난달 4일 취임한 이성희 농협중앙회장의 인사권을 존중해 이 행장이 용퇴를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행장뿐 아니라 허식 농협중앙회 부회장, 소성모 농협상호금융 대표, 김원석 농업경제 대표, 박규희 농협중앙회 조합감사위원장, 이상욱 농민신문사 사장, 김위상 농협대 총장 등 농협중앙회 계열사 경영진 7명이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중앙회장이 새로 취임하면 농협 계열사의 임원들이 사의를 표명해 왔다는 점에서 일종의 관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행장은 김병원 전 농협중앙회장의 사람으로 통한다. 이 행장은 김 전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지난 2016년 은행 본부장에서 상호금융 대표이사로 파격 승진했고, 2018년 은행장으로 선임됐다. 이 행장의 사퇴가 이미 예견됐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애초부터 이 행장의 3연임이 가능했던 배경이 신임 중앙회장 취임에 대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새로운 신임 행장을 선임했다면 농협중앙회장 선거 이후 바꾸기가 더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 연임을 결정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행장의 퇴진은 아쉬운 면이 있다. 이 행장은 취임 후 1년 만에 농협은행의 당기순이익을 1조원대로 끌어올리고, 2년 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이끌었다. 때문에 이 행장의 3연임이 결정됐을 당시만 해도 농협금융에 성과주의 문화가 정착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농협이라는 우산 아래에서는 금융계열사 CEO도 중앙회장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줬기 때문이다. 안정성과 독립성이 중요한 금융사 지배구조를 고려하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농협금융지주는 2012년 농협중앙회에서 신경분리(금융 부문인 신용 사업과 유통 등의 경제 사업 분리)로 떨어져 나왔다. 표면적으로 농협은행장 선임은 농협금융 임원추천위원회에서 경영승계절차를 밟아 최종 후보자를 가린 뒤 농협은행 임원추천위원회에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후 농협은행 주주총회를 거쳐 최종 선임한다. 절차상으론 인사에 중앙회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농협중앙회가 농협금융 계열사 인사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막강하다. 농협중앙회가 농협금융지주에 자본금 100%를 출자한 단독 주주다. 또 농협금융지주가 농협은행을 비롯한 농협생명·농협손해보험의 100% 주주다. 농협은행장 인선에서 지배구조의 꼭대기에 있는 단일주주 농협중앙회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금융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농협중앙회의 선거 결과에 휘둘리게 하기 보다는 독립성을 지켜주는 게 농협금융의 경쟁력을 지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