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설국치악'…사람도 풍경도 예술이 되다
by강경록 기자
2015.12.11 06:41:00
강원 원주로 떠난 겨울맞이 여행
해발 275m '뮤지엄 산'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 설계
풍경·사람 어우러져 조경도 걸작
눈꽃 단장한 3대 악산 '치악산'
빼곡한 금강송 하늘지붕 씌우고
세렴폭포 물줄기 마음 씻어주네
| 강원 원주시 오크밸리리조트에 둥지를 튼 ‘뮤지엄 산’ 입구가 폭설을 맞아 설국으로 변했다. 뮤지엄 산은 치유와 명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미술관이다.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콘셉트로 건물뿐 아니라 뮤지엄 부지 전체를 설계했다. |
|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눈이 내린다. 빌딩 숲 사이로 흩날리던 눈발이 굵어졌다. 마음이 잠시 싱숭생숭했지만 높다란 빌딩과 자동차 틈새에 끼여 낭만은 이내 사라져버린다. 도심의 메마른 겨울 풍경이 시작됐다. 아쉬움에 발길을 강원 원주시로 향했다. 제대로 오롯한 초겨울을 느끼고 싶어서다. 원주는 여행목적지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고장이다. 치악산과 간헌유원지가 그나마 알려졌을까. 하지만 원주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미처 개발업자의 손을 타지 않은 여행지가 즐비하다. 안도 다다오와 제임스 터렐의 손길을 거친 ‘뮤지엄 산’이 그렇고,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지어졌다가 자취만 남은 폐사지들이 그렇다. 치악산으로 가면 ‘악산 중의 악산’이란 명성과 달리 걷기 좋은 숲길도 있다. 눈길 돌리는 대로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함을 맛볼 수 있다.
◇자연 품은 미술관에서 엿본 존재의 진실
강원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 오크밸리리조트. 이곳에 치유와 명상을 콘셉트로 한 미술관이 있다. 서울 남산과 비슷한 높이인 해발 275m 산중에 자리한 ‘뮤지엄 산’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무려 40여년간 수집한 자신의 소장품 4000여점을 내놓아 2013년 5월 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한솔뮤지엄’으로 개관했고 그해 12월 뮤지엄 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산(SAN)은 공간(Space)과 예술(Art), 자연(Nature)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만든 조어다.
뮤지엄 산이 유명해진 건 일본의 현대 최고의 건축가 일본 안도 다다오와 빛의 작가로 유명한 미국의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한데 볼 수 있어서다. 안도의 건축철학과 특징은 건물 곳곳에서 잘 드러난다. 안도의 예술성은 둥그런 돌담을 따라 느릿하게 들어선 목적지를 보일 듯 말듯 숨겼다. 관람객의 시선과 동선까지 계산해 빠져들게 한 진정한 밀당의 고수다.
| 고요한 물의 정원이라는 뜻의 ‘워터가든’에 폭설이 내려 ‘스노우가든’으로 변한 보습. 붉은색 구조물은 알렉산더 리버만의 설치작품 아치웨이다. |
|
건물 밖 조경도 안도에게는 작품이다. 안내센터에서 나와 마당을 지나면 자작나무 숲길. 아낙네 살결보다 하얀 자작나무가 좁게 도열하듯 서 있다. 살짝 휘어지게 낸 이 자작나무길은 멀리서 보면 아주 길게 이어진 듯하다. 담장처럼 ‘보일 듯 말 듯’의 효과인 셈이다.
본관 뮤지엄은 자작나무 숲길 너머에 있다. 페이퍼갤러리와 청조갤러리로 꾸몄다. 각 전시관은 미로처럼 이어졌다. 선과 선, 면과 면의 조합이 절묘하다. 좁은 건물을 효과적으로 구분해 최대로 넓게 보이게 했다. 미로 같은 본관 건물을 나서면 야외 산책길이다. 이곳에도 작품은 이어진다. ‘두 벤치 위의 연인’ ‘스톤 가든’ 등의 조각품이 그것.
이 길 끝이 제임스 터렐관이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만을 위해 안도가 설계했다. 건물 전체가 터렐의 작품인 셈. 빛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마법 같은 공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우리가 평소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알려주는 사유의 공간이다. 제임스 터렐관에는 4개의 대표작이 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환영을 경험하는 작품이 ‘웨지워크’, 수시로 변하는 하늘의 색깔을 보며 어느 것이 진짜 하늘인지 헷갈려 눈을 의심케 하는 ‘스카이스페이스’, 공간감 짙은 인간 지각의 부실함을 깨우치는 ‘간츠펠트’, 계단을 올라서야 알게 되는 진실에 아찔한 전율을 느끼는 ‘호라이즌’ 등이다. 빛으로 공간의 개념을 바꾼 터렐의 마술에 빠져든다.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터렐의 최면술처럼 말이다.
| 강원 원주시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뮤지엄 산’에 조성한 자작나무숲 산책길. 자작나무가 폭설을 뒤집어쓰고 더욱 하얗게 변했다. |
|
◇눈 쌓인 숲길 품은 ‘악산’
원주의 대표 명소는 치악산이다. 흔히 치악산은 설악산·월악산과 함께 3대 악산으로 불린다. 비록 ‘악’자의 한자가 다르기는 하나 바위가 많고 산이 험하다는 점은 같다. 이토록 험한 치악산을 찾은 이유는 눈 쌓인 멋진 숲길이 있어서다. 숲길은 구룡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해 구룡사, 세렴폭포로 이어지는 3㎞의 짧은 산길이다.
숲길 여행의 시작은 황장금표(黃腸禁標)부터다. 황장금표는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편 경사면의 숲에 살짝 숨어 있다. 표를 끊고 걸음을 서두르다 보면 자칫 놓치기 쉽다. 황장금표는 민간의 벌채를 금한다는 뜻. 치악산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쓸 황장목을 길러내는 산이었다. 치악산을 예로부터 황장봉산으로 부른 이유다. 전국 60여곳에도 황장금표가 있었다. 이곳 구룡사 쪽으로 접어드는 길의 황장금표도 그중 하나다.
황장금표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주변에 솟아있는 붉은색 껍질의 금강소나무가 새삼스럽다. 황장금표가 들어설 당시만은 못하겠지만 이 길에는 소나무가 하늘을 가려 지붕을 만든 숲길이 군데군데 이어진다. 치악산 황장목의 아름다움은 구룡교 건너 구룡사의 일주문 격인 원통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이쪽의 소나무 숲에는 저마다 다른 크기의 금강송이 한데 어울려 서 있다. 그만그만한 나무가 줄지어 빼곡히 들어선 조림지의 숲과는 격이 다르다. 조림한 숲에선 규모에 처음 입이 벌어지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금세 지루해지게 마련. 하지만 치악산의 금강송숲에 들면 되레 처음에는 무덤덤하다가 저마다 크기가 다른 나무를 찬찬히 바라볼수록 탄성이 터져 나온다.
원통문의 숲길을 들어서 부도탑을 지나면 구룡사다. 원래는 절터의 연못에 9마리 청룡이 살았다고 해서 처음에는 아홉 구(九)자를 써 구룡사(九龍寺)였다는데, 이후 쇠락한 사찰의 번성을 위해 절 입구 거북바위의 혈을 끊고 다시 이으면서 거북 구(龜)자를 쓴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절집 앞에는 수령 200년을 넘긴 잘 생긴 은행나무가 부챗살처럼 가지를 뻗고 있다.
구룡사를 지나서 몇 걸음이면 구룡폭포의 물소리를 만난다. 숲길을 걷는 내내 발목을 잡았던 물소리가 이곳에 이르면 더 청아한 소리를 낸다. 크지는 않되 부드럽게 떨어지는 폭포 아래는 쪽빛의 물이 그득하다.
여기서부터 세렴폭포까지는 약 2㎞ 거리다. 세렴폭포까지 이어진 길도 완만하다. 하지만 눈이 제법 내리면 미끄러운 길이 된다. 1970년대에 인위적으로 만든 전나무숲길, 아담한 식물원을 지나 좁은 산길을 따라 30여분 오르면 세렴폭포에 다다른다. 마음까지 씻어준다는 의미란다. 그래서일까. 눈으로만 본다면 가느다란 물줄기지만 눈을 감고 차분히 바라보면 환상적인 폭포 물줄기가 정말 마음까지 씻어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행메모
△가는길=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문막IC에서 원주방면으로 나와 능촌교차로에서 오크밸리 방면으로 좌회전해서 가면 뮤지엄 산이다. 치악산 구룡탐방지원센터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새말나들목으로 나와 구룡사 이정표를 따라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묵을곳=뮤지엄 산은 오크밸리리조트(1588-7676) 내에 자리하고 있다. 콘도형과 호텔형이 있어 원하는 곳에 묵으면 된다. 원주 시내에는 원주역사박물관 옆 호텔 인터불고 원주(033-769-8114 )를 추천한다. 원주 시내 유일한 특급호텔이다.
△먹을곳=원주의 숨은 맛집 중 하나인 일산동 ‘시래기순대국’(033-731-8430)은 시래기와 들깨로 국물을 낸 시래기순대국(7000원)과 선지해장국(5000원)이 일품이다. 구수하면서도 얼큰한 맛이 해장국으로 제격이다. 원주 중앙시장 내에 자리한 샘밭(033-742-2173)은 푸짐한 한우숯불구이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한우모둠 1인분이 2만 5000원이다. 일산동에 있는 산정집(033-742-8556)은 한우를 얇게 썰어 미나리와 쪽파 등을 함께 말아 만든 손말이구이(1인분 2만원)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