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조 예산편성권 국회로?…기재부 갑질 방지 VS 고양이 앞 생선
by박종오 기자
2017.01.10 05:00:00
| △국회 청소 노동자들이 지난달 5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직접 고용 환영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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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야당과 정부는 작년 말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인 국회 청소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두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국회가 이를 위해 올해 청소 용역 예산을 직접 고용 예산으로 돌리려 하자 예산 편성권을 가진 기획재정부가 반대한 것이다. 다른 공공 부문 비정규직에까지 파장이 미칠 것을 우려해서다. 결과적으로 기재부가 주장을 굽히긴 했으나, 예산을 증액하는 것이 아닌 비목(경비 성질 분류) 변경조차 정부 동의를 받아야 하는 입법부의 왜소한 재정 권한을 보여준 사례다.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를 위한 개헌 논의가 불붙으며 이 같은 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국회에 넘기는 방안이 새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통령이 틀어쥔 권력 분산은 필요하지만, 실효성 등을 고려해 예산 편성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식의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9일 정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최근 당 지도부 및 대선 주자 5명에게 배포한 ‘개헌 보고서’에서 4년 중임 대통령제 개헌의 주요 과제로 “입법권과 예산권을 국회에 넘기고 사법권을 독립할 것”을 제안했다.
현행 우리나라 헌법은 행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해 제출하면 국회가 이를 심의해 확정하도록 하고 있다.(54조 1항) 그러나 국회는 정부 동의 없이는 지출 예산액을 늘리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57조) 정부가 예산 편성권을 독점하고 국회는 예산 감액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국회가 예산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실제로 정부가 제출한 올해 본예산 지출액 총 400조 7000억원 중 국회 심의 과정에서 늘거나 줄어든 금액은 약 9조 3000억원(2.3%) 수준에 그쳤다.
이런 행정부의 예산 편성 권한을 헌법 개정을 통해 국회로 넘기자는 것이 연구원 주장이다. 본보기는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이다.
미국은 상·하원 의회가 막강한 예산 권한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예산을 법 규범 정도로 여기는 한국과 달리, 미국 헌법이 예산을 법률로 규정하고 의회의 법 통과 없이는 나랏돈을 쓸 수 없도록 제한해서다.(연방헌법 1조 9항 7호)
미국은 재무부가 아닌 대통령실 소속 기관인 관리예산처(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OMB)가 한국의 기재부 역할을 한다. 예산편성지침을 마련하고 각 연방 기관으로부터 받은 예산 요구서를 바탕으로 ‘대통령 예산’(President’s Budget Proposal)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적 효력이 없는 예산 심의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의회는 독자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거나 예산안을 무제한 수정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미국식 예산 편성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뜨거운 감자였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2009년 성균관대 교수 재직 당시 참석한 토론회에서 “예산 심의의 전문성과 책임성 등을 높이는 것을 전제로 국회의 예산 편성권을 인정하는 ‘예산 법률주의’ 도입을 검토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2014년 새누리당 당 대표 경선에서는 예산 편성권의 국회 이관을 공약으로 제시됐다. 예산이 대통령 선거 공약 등 정치적 입김에 좌우되는 것을 차단하고 납세자인 국민 의사를 반영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실효성이다. 당장 의회의 전문성을 문제 삼아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편성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통령 예산이 빠져나간 틈을 지역구 선심성 예산이 차지하는 등 정치적 영향을 근본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기재부는 이런 논쟁이 불거지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기재부 예산실 관계자는 “의회가 예산 편성권을 전적으로 행사하는 미국 같은 형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면서 “미국도 자세히 뜯어보면 정부가 예산안을 짜고 그걸 바탕으로 국회가 심사하는 구조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이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선진국의 경우 의회가 예산안을 고칠 수 없거나 정부 동의를 받아 증액할 수 있는 등 권한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들 국가는 의회 다수당이 정부 내각을 구성해 국정을 주도하는 ‘의원내각제’(프랑스는 준대통령제) 특성상 의회의 행정부 통제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한국과는 단순 비교가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웃한 의원내각제 국가인 일본은 한국과 같이 예산을 법률로 간주하지 않지만, 의회의 예산 증액을 허용하고 있기도 하다. 한 기재부 과장은 “국회가 기재부가 권력을 행사하는 게 못마땅하니 뺏어오자고만 주장할 게 아니다”라며 “큰 틀에서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한 분배를 어떻게 할지 먼저 결정한 후 신중히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산 편성권의 전면적인 전환보다 기존 제도 개선과 보완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국회의 한 예산 전문가는 “정부의 예산 편성권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정부가 너무 불투명하고 자의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며 “지나치게 폐쇄적인 예산 관행이 최근 최순실 예산 같은 문제가 불거지는 원인이 되는 것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현재 우리나라 예산서는 사업별 예산액만 통계표 형식으로 작성돼 통제는커녕 사업 현황 파악조차 어려운 형편이다. 최근 국내 이슈에 비유하자면 미국은 기관별 세출법에 “대통령 침대 구매비로 1100만원을 사용할 수 있다. 단, 이 재원으로 비아그라를 사면 안 된다”는 식의 구체적인 지출 요건과 제약 등을 명시한다. 한국과 대조적이다.
예산이 법률이 아닌 탓에 책임을 묻기 어렵고, 국회가 정보 공개 등을 요구해도 헌법이 부여한 배타적 권리를 방패막이 삼아 모른 체하면 그만인 문제도 있다. 한 국회 관계자는 “기재부가 최소한 각 부처에 배분하는 예산 총액 한도 정도는 공개해야 의회가 거시적인 재원 배분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며 “예산 편성의 투명성을 강화한다면 효과 없는 사업 예산을 깎아 복지나 사회 안전망에 투입하는 등 행정부와 입법부 간 실효성 있는 정책 협의와 상호 견제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