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염수정 추기경의 '생명주일 담화문'
by윤종성 기자
2021.04.22 06:30:11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국 주교회의가 정한 제11회 생명 주일(5월 첫 주일)을 맞으면서 저는 ‘가정과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성, 사랑, 생명에 관한 주제를 함께 성찰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이는 3월19일부터 보편 교회가 시작한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를 보다 의미 있게 보내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난해 국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과 초등학생 대상 성교육 교재 배포 등 몇몇 사건들을 계기로 성소수자, 동성애, 혼인의 의미 등 인간의 성(性)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특히 차별금지법안의 일부 조항에 드러나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의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또한 이런 이념들은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윤리관과도 어긋납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남녀의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별과 성적지향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념입니다. 이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창조하시고 서로 협력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신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릅니다. ‘동성애’로 이해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을 법적 가족 개념에 포함하는 것도 평생을 건 부부의 일치와 사랑, 그리고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가정의 고유한 개념과 소명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에,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공식 입장을 분명히 전하며 여러 가지 논란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판단과 실천에 대해 성찰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라는 성경 말씀처럼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이 구분은 타고난 몸을 토대로 하는 것이지, 사회나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염색체나 신체 발달상의 어떤 이유로 이런 구분이 모호한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구분에 변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은 단지 생물학적인 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닌, 지성과 정서와 자유를 지닌 영적이고 인격적인 몸입니다. 따라서 타고난 몸의 남녀 구분에도 영적이고 인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남녀의 구별은 각 사람이 성장하고 인격적 친교를 맺으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서로를 보완해주고 협력하는 가운데 함께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며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가부장 문화 아래 성차별의 구실이 되고, 또한 문화적으로 남녀의 성적 차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이 있었다고 해서, 그런 이유로 남자와 여자의 구별과 다름이 가진 풍요로운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부부로서 자신을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선물로 내어주는 인격적 사랑의 행위를 통해 둘이 한 몸이 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인격체를 낳습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인격적 친교는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인 가정의 토대가 되며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가운데 부모와 자녀의 사랑으로 확장되고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에페 5, 31-32)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동등하게 주어집니다. 생명과 안전, 주거와 고용, 교육과 의료 등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동선에 참여할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각 사람이 인종, 출신국가, 성별, 피부색, 종교 등은 물론 동성애와 같은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 등을 이유로 부당한 차별이나 폭력적인 언사나 행동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동성애 성향 때문에 내적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친절과 존중,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부당한 차별의 반대를 동성혼 등을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사용하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라는 표현에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한 사람이 타고난 몸과 그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성적인 성향을 분리하여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즉 타고난 몸은 객관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고,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이 서로를 향하며 결합하는 것이 자연법의 질서이지만, ‘젠더 이데올로기’는 객관적인 몸의 질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적 성향이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교회는 객관적인 몸의 질서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동성애 등 이러한 성향 자체를 “객관적인 무질서”로 바라봅니다.
또한 어떤 성향을 지닌 것과 개별적인 그 행위를 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동성애 성향을 지닌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경우라도, 그 행동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그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행위를 위해 동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성에 관한 창조주의 계획”과 “그 풍요한 상징과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 행위처럼 성적 행동이 타고난 몸의 객관적 질서와 인격적 의미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은 단지 이기적으로 이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물론 이성 간의 성행위에서도 서로의 몸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거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지 않는다면, 같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속적이고 전적인 결합으로, “서로를 완성하고, 관심과 배려, 그리고 출산을 통해 자연스러운 인생 여정을 걷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속합니다. 혼인이 사회적·법적 인정과 보호를 받는 이유는 혼인과 가정이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사회 구성원을 사랑 안에서 낳고 길러냄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지속에 반드시 요청되는 ‘공동선’에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성애 행위에는 참된 일치와 생명 출산, 남녀 간의 상호보완성이라는 의미와 가치가 빠져 있습니다. 즉 동성 간의 성적 관계는, 혼인과 가정이 토대로 하는, 몸의 결합과 출산이라는 객관적 의미가 구조적으로 빠져 있으므로 ‘혼인’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이는 부당한 차별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만일 두 사람의 주관적인 애정만을 조건으로 동성 간의 혼인을 사회적·법적으로 인정한다면, 혼인이 지닌 고유한 의미는 훼손되고 공동선에 기여하는 혼인의 가치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동성 간에는 불가능한 자녀 출산을 위하여, 인공적 생식 기술을 이용하거나 자녀 입양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부모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 “한 아빠와 한 엄마를 갖고 싶은 자녀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전인적 성장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는 최우선적”이고 본질적이라고 말합니다. 성교육 역시 부모의 일차적 책임이며 “참되고 완전한 인격 훈련을 목표로 하여” “부모의 면밀한 감독 아래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성교육에서는 혼인 밖에서의 성관계를 용인하면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과 인간관계가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한 가르침이 종종 결여됩니다.
성은 인격을 구성하고, 인간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요구되는 근본적 요소이고, 생명 전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성교육은 인격적 사랑의 교육이자 생명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가톨릭교회의 정신에 따른 인격적 성교육 프로그램인 ‘틴스타(TeenSTAR)’에 자녀들이 참여하는데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보여주시길 요청합니다. 아울러 본당의 사목자들도 부모님들을 도와 이러한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에게 제공되도록 더욱 애써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개인의 자유, 자유로운 선택,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자유의 시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 사고방식은 성과 사랑과 혼인 그리고 가정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처럼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유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양심의 판단과 진리에 봉사하고, 공동선을 보존하고 실현할 때 비로소 정당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성찰해 온 사랑과 참된 성의 의미, 가정과 혼인의 가치를 보존하고 실현하는 ‘책임 있는 행위’ 안에서 정당한 자유를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이와 같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성적인 본성과 사랑의 능력이 단순히 욕구나 감정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덕’으로 성장하여, 더욱 충만한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주님의 도움과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3-14).
2021년 5월 2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염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