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호의 PICK]조종사로 돌아온 차지연의 화려한 비상

by장병호 기자
2020.05.18 05:30:00

국내 초연 오른 1인극 ''그라운디드''
''갑상선암 투병'' 차지연 복귀작
군용 무인기 조종사 고뇌 그려
일상 스며드는 전쟁의 폭력성 고발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지난 15일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2경. 1인극 ‘그라운디드’의 공연이 끝나자 90여 분간 홀로 무대를 이끈 배우 차지연의 표정은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가득했다. 지난해 4월 갑상선암 투병으로 활동을 중단한지 약 1년만의 무대. 화장기 없는 얼굴로 공연을 펼친 그는 깊은 감회에 젖은 듯 관객에게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그라운디드’는 차지연의 무대 복귀작으로 공연계의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다. 차지연은 올해 초부터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콘서트와 tvN ‘더블 캐스팅’ 출연으로 활동을 재개했지만 본격적인 무대 연기에 나선 것은 ‘그라운디드’가 처음이다. 주로 뮤지컬에서 활약해온 차지연이 2010년 ‘엄마를 부탁해’ 이후 10년 만에 선택한 연극이라는 점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1인극 ‘그라운디드’ 콘셉트 이미지(사진=우란문화재단).


개막 둘째 날인 이날 공연에서 차지연은 지난 1년여 간 쉬어야 했던 아쉬움을 날려버리려는 듯 무대를 장악했다. 차지연이 맡은 주인공은 에이스급 전투기 조종사였지만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전투기 대신 군용 무인기를 조종하게 된 여성 파일럿. 차지연은 머리 위로 끝없이 펼쳐진 ‘블루’를 향한 꿈을 포기한 주인공이 조그만 스크린 속 전장(戰場)과 남편과 어린 딸이 기다리는 일상을 오가며 겪는 복잡한 감정 변화를 흡입력 있게 소화해냈다.



차지연은 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가슴 한 켠에 연극에 대한 동경과 갈망도 커졌다”며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막힘없이 단숨에 읽어내려 갔고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지면서 ‘이건 무조건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참여하게 됐다”고 ‘그라운디드’를 무대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그라운디드’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베르나르다 알바’ ‘사랑의 끝’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등을 공동기획으로 소개해온 우란문화재단과 프로젝트 그룹 일다가 함께 선보이는 국내 초연작이라는 점이다. 원작은 미국 극작가 조지 브랜트의 희곡. 2013년 초연해 전 세계 19개국 12개 언어, 140개 이상 프로덕션으로 공연하고 있다. 2015년에는 앤 해서웨이가 뉴욕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제목은 ‘현실에 기반을 둔’이라는 뜻의 형용사다. 군사용어로는 ‘비행이 금지된’이라는 뜻이지만 속어로는 ‘외출이 금지된’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성 파일럿의 임신과 출산을 다룬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 시선이 예상되지만 작품의 주제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군용 무인기 조종사들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PTSD)에 방점을 찍는 작품은 기술의 발전으로 일상에 스며드는 전쟁의 폭력성 문제를 고발한다. 공연 중간 딱 한 번 등장하는 무대 전환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좀처럼 잊기 힘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연극 ‘킬 미 나우’ ‘내게 빛나는 모든 것’,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등에 참여한 연출가 오경택이 연출을 맡았다. 작곡가 김태근, 무대 디자이너 김종석, 음향 디자이너 권지휘, 조명 디자이너 김성구, 의상 디자이너 도연 등이 창작진으로 참여했다. 공연은 오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