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퇴직연금]②교육책임 미루는 기업, 이메일만 보내는 사업자
by정수영 기자
2017.10.23 06:28:30
퇴직연금, 뭐가 문제인가
퇴직연금 교육 위탁형태 이메일로 이뤄져
기업 임금인상률 3%이상, 퇴직연금 1~2%
DC형도 상위 3개 펀드에만 자금 대거 몰려
[이데일리 정수영 기자] 최근 퇴직연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직장인 A씨는 회사가 근로자에게 매년 관련 교육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단 한번도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회사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교육을 위탁하면서 그동안 이메일로 진행돼온 것이다. A씨는 이메일을 뒤져봤지만 하루에도 수십통씩 밀려오는 광고성 스팸메일 속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다.
회사가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을 계약한 B씨는 얼마 전 자신이 가입한 상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남들도 다 가지고 있다는, 잘나가는 일등 퇴직연금펀드에 가입했다고 안심했는데 지난해 수익률이 마이너스였기 때문이다. 1년 전만 해도 약 10%에 달하던 퇴직연금 누적 수익률이 그 새 6%대로 줄었다는 사실에 저절로 한숨이 났다. 퇴직연금이 고령화시대 안정적 생활보장 방안으로 떠올랐지만 기업과 근로자, 사업자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쌓인 자금이 150조원에 이르지만 안전자산 위주의 자금운용과 낮은 연금전환 비율 등 숙면상태나 다름없다. 고령화시대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선 잠자고 있는 퇴직연금을 깨워 시장활성화를 유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실제 A씨처럼 퇴직연금 교육에 대해 잘 모르는 근로자가 대부분이다.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은 연 1회 의무로 위반시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렇지만 회사가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위탁 운영할 수 있고, 이메일, 서면 등 비대면으로도 가능해 요식행위로 이뤄지는 게 다반사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퇴직연금 가입 기업의 94.6%가 위탁교육을 진행하고 있고, 전체 교육의 93.7%가 서면이나 이메일 형태였다. 김성일 KG제로인 연금연구소 소장은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상 가입자 교육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지만 성과는 가장 지지부진하다”며 “가입자교육이 부실해 자기가 가입한 퇴직연금제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부실한 교육으로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떨어지면서 퇴직연금 운용지시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지난 2014년 조사한 퇴직연금 운용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DC형 가입자가 한번도 운용지시를 하지 않은 비율은 전체의 41%였고, 이들 대부분은 원리금보장 상품에 가입한 채 묵혀둔 상태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현재도 2014년과 큰 차이가 없는 상황으로, 제조업 종사자들은 노동과 운용을 병행할 여건이 안되는 근로자들이 많은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미래에셋대우가 가입자(2008~2013년)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가입자들은 원리금보장과 현금을 주로 선택했지만 이후 변경을 하지 않고 가입 초기 포트폴리오가 고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은 “퇴직연금 운용성과를 높이기 위해선 복잡한 구조의 상품 유형을 간소화하고, DB와 DC형의 합리적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또 “퇴직연금 DC주식 비중 70% 제한을 없애는 등 운용규제도 완화해야 수익률도 제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익률 감소는 확정급여형(DB형)을 선택한 기업의 재무부담으로 이어진다. DC형의 경우 회사가 퇴직금을 계좌로 100% 적립하지만 DB형은 80%까지만 적립하면 된다. 문제는 매년 근로자 평균 임금상승률이 3% 이상인 반면 원리금보장형은 수익률이 연 1~2%로 기업 입장에선 오르는 임금상승분 만큼의 수익률도 내지 못하면서 부채가 늘어나는 격이다. 결국 적립금을 대출로 해결하는 조건으로 사업자가 권하는 원리금보장상품에 가입, 금리 정도의 수익률에 만족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미래에셋대우가 2015년 코스피200기업 가운데 DB형을 선택한 기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임금상승률 4~6% 사이인 기업이 전체의 54%에 달했다. 반면 그 해 DB형 퇴직연금의 연간수익률은 2.11%에 그쳤다. 이들 기업 중 기본적립금비율인 80%를 못쌓은 회사가 51.4%에 이른다. 최순주 한화자산운용 연금컨설팅팀장은 “예금이나 보험 같은 금리연동 상품을 선호하는 현장이 일부 있지만, 대출 등의 이유로 사업자를 선택하는 행태가 지속된다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며 “수수료 인하나 관리서비스, 수익률 개선 등 선의의 경쟁이 이뤄져야 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입자가 무관심한 데는 퇴직사업자나 자산운용사들도 자유로울 수없다. 퇴직연금 실적배당형 상품운용이 과거 성과가 우수한 몇몇 상품에 몰려 있는 행태도 문제다. 실제 제로인에 따르면 퇴직연금 수탁고 상위 5개 펀드에 전체 실적배당형 적림금의 3분의 1이상이 집중돼 있다. 하지만 이 5개 펀드 가운데 2곳은 지난해 마이너스 흐름을 모였다. 김재현 한국연금학회장(상명대학교 글로벌금융경영학과 교수)는 “상위 3개 펀드를 비교해보면 규모가 커지면서 수익률도 낮아지는데, 퇴직연금 가입자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적립금을 쌓았다”며 “펀드의 추이를 사용자나 근로자가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운용결정이 이뤄지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금융 위기시 신규가입자는 원리금보장형 상품 중심으로 선택했는데, 이후에도 유사한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있다”며 “상품 라인업 제시 및 투자교육을 수행하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