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찍어내는 상품권 年10조…티메프 '돌려막기' 수단 전락했다
by김국배 기자
2024.08.01 05:00:25
[티메프 사태 또다른 뇌관 상품권]
머지 사태 겪고도…상품권 규제 손놓은 정부·국회
인지세만 내면 누구나 발행
티몬, 10% 할인가에 해피머니 판매…자본없이 단기 자금 조달 ''연명''
상품권법 제정해 규제 사각지대 없애야
[이데일리 김국배 송주오 기자] 상품권이 티몬·위메프(티메프) 판매대금 정산 지연 사태의 또 다른 ‘뇌관’이 됐다. ‘티메프’에서 해피머니 등 상품권을 산 소비자가 이번 사태 후 상품권 사용이 막히면서 피해를 보고 있다. 멀쩡했던 상품권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된 건 결국 상품권 발행과 유통 등 규제를 제때 마련해야 할 국회와 금융당국이 그간 손을 놓고 있었던 탓이라고 지적한다. 이번 티메프 사태를 계기로 지난 1999년 폐지된 후 25년간 부활하지 못하고 있는 ‘상품권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티메프 사태가 터진 지 23일째인 31일 티몬 등에서 판매됐던 해피머니 상품권 사용이 막히면서 소비자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상품권 시장은 소비자가 구입한 상품권을 제휴사에서 쓰면 제휴사 발행업체에 돈을 청구하는 구조인데 티메프가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서 사용을 막은 것이다.
이처럼 상품권 시장이 혼돈에 빠진 건 사실상 현재 상품권 발행업자 자격 요건, 연간 발행 한도 등을 규정하는 법적 근거가 없던 것이 ‘독(毒)’이 됐다는 분석이다. 상품권의 합리적 유통과 이용자 권익 보호를 위한 상품권 관련 법안이 20대(2017년), 21대(2021년) 국회에서 각각 발의됐지만 번번이 폐기됐다. 이 법안들은 상품권을 발행하려는 자가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춰 금융위원회에 신고하고, 이용자 보호 등을 위해 필요할 때 금융위가 자본금 등 기준에 따라 연간 발행 한도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된 이후 아직 관련 법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지세만 내면 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다. 실제로 해피머니의 이용약관 제11조를 보면 ‘상품권은 별도의 지급 보증과 피해보상 보험계약 없이 발행자의 신용으로 발행됐다’고 명시돼 있다. 심지어 해피머니 발행사인 해피머니아이앤씨는 수년째 부채총계가 자산총계보다 큰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다.
금융당국에 선불업체로 등록돼 있지 않고 지급보증보험도 없다. 거기다 티몬과 위메프는 해피머니 상품권 5만원권을 4만 6250원에 할인(7.5%) 판매하면서 ‘단기 자금 조달 수단’처럼 썼다. 금융당국의 허술한 관리·감독이 도마 위에 오르는 이유다. 티메프는 이미 2019년과 2020년부터 자본 잠식 상태였다. 금융당국이 한 거라곤 강제성 없는 경영개선협약(MOU)체결이 전부였다. 티몬은 지난 4월부터 감사보고서도 제출하지 않았고 5월부터는 상품권을 10%씩 할인한 가격에 대규모로 판매했다. 2021년에 머지포인트 사태도 상품권을 20% 할인한 가격으로 돌려막기 하다가 부실이 터졌는데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티메프를 보고도 모른 척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규제 사각지대’인 상품권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4조 4952억원 수준이던 ‘e-쿠폰서비스 거래액’(전자상품권 거래 규모)은 지난해 10조 649억원으로 3년 만에 두 배가 됐다. 피해는 상품권 업체에도 부메랑이 돼 돌아가고 있다. 다이소·11번가·이마트 등은 컬쳐랜드 상품권 사용을 막았다. 미수금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보고 사용을 막은 것이다. 컬쳐랜드 상품권을 운영하는 한국문화진흥원은 “회사는 ‘전자금융업 등록업체’로 전자금융업 관리규정에 따라 고객 선불 충전금과 결제 대금을 100% 보증보험에 가입해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서둘러 진화에 나서고 있다.
도서문화상품권과 북앤라이프 캐시를 운영하는 페이즈북앤라이프도 서비스 임시 점검 조치에 “당사가 아닌 사용처의 사유에 따른 것”이라며 수습 중이다. 페이즈북앤라이프의 지난해 부채비율은 1903%로 전년(1195%)에 이어 1000%를 넘었다. 금융당국은 티메프가 상품권 업계에 지불하지 않은 판매금이 533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상품권 문제에 따른 피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5년 패션그룹 형지가 경영난에 빠진 에스콰이어를 인수한 후 발행일로부터 5년이 지난 에스콰이어 상품권의 권리를 소멸시키면서 해당 상품권을 보유한 소비자가 한순간에 사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상품권 규제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이 9월에 시행되지만 여전히 발행사 자격 요건은 별도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전금법이 아닌 상품권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영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상품권은 발행자의 신용을 기본으로 발행하고 있는 만큼 발행자의 자격 요건을 엄격하게 하고 상품권 이용자 보호를 강화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상품권은 현재 정확한 총량을 추산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히 얼마인지도 모른다”며 “일종의 화폐인데 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니 제2, 3의 머지포인트 사태 발생이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