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합의 깨졌다", "아니다"…美정치에 놀아난 시장

by정다슬 기자
2020.06.24 01:00:00

실물경제 못 쫓아가는데 유동성장세에 자산가치만 커져
작은 이벤트에도 ''흔들''…"시장 가장 큰 리스크는 정치"

△5월 29일(현지시간)미국 워싱턴 백악관 웨스트윙 캐비넷 룸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기자회견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피터 나바로 미국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 국장이 바라보고 있다.[사진=Afp제공]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미·중 무역합의’를 둘러싼 미국 백악관 고위관계자들의 엇갈린 메시지에 전세계 금융시장이 한순간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22일(현지시간) 한 방송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1단계 무역합의를 파기하기로 했다고 발언하면서 글로벌 증시는 일제 하락했으나, 곧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며 수습에 나섰다. 이번 해프닝에서 최소한 나바로 국장은 오는 11월 미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다분히 계산적인 발언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건의 발단은 나바로 국장이 폭스뉴스 ‘더스토리’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정보 당국자들이 중국 우한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코로나19 대유행이 발생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1차 무역합의를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진행자인 마샤 맥칼럼이 “대통령은 중국과의 합의가 잘 진행되길 바랐지만, 당신이 열거한 이유들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나바로 국장은 “그렇다. 그것은 끝났다”(It‘s Over, Yes)라고 답했다.

이 발언은 즉각 미·중 1단계 무역합의가 파기됐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발언이 알려진 직후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 500 선물은 1.6% 떨어졌다. 안전자산으로 취급되는 미국 국채, 금 가격은 올랐다. 흔히 ‘공포지수’라고 불리는 VIX지수 7월물은 순식간에 8.5%나 상승했다.

시카고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옥수수, 대두, 밀 선물도 흔들렸다. 이들 농산물은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 수출품이다. 앞서 미국과 중국은 지난 1월15일 이뤄진 1단계 무역합의에서 농산물을 포함한 미국산 제품을 2년간 2000억달러 규모로 구매할 것을 약속했다.

개장 중이었던 아시아 증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날 1%대 강세로 시작해 안정적으로 2150 중반대를 유지했던 코스피 지수는 장중 한때 반락하며 2110.51까지 내렸다. 같은 시각 코스닥도 전일보다 0.46% 오른 755.12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곧바로 분위기를 바꿔 744.26까지 내려앉았다. 일본 닛케이225 평균지수, 중국 상하이종합지수, 홍콩 항셍지수 역시 일제 하락 장면을 연출했다.

심지어 가상화폐조차도 출렁이는 시장의 흐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이날 장 초반 9800달러에 거래된 비트코인은 9610달러로 0.4% 가량 하락했다.

금융시장이 출렁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진압에 나섰다. 그는 이날 밤 10시22분께 트위터를 통해 “미·중 무역합의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그들은 합의를 지켜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바로 국장 역시 성명을 내고 “내 발언이 맥락에 맞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내가 했던 말은 현재 가동 중인 1단계 무역합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 무역합의는 계속 지켜지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이 ‘다 끝났다’고 했던 것은 중국과의 무역협상이 아닌 ‘중국 공산당에 가지고 있던 신뢰’였다는 것이다.

2시간 가량 벌어졌던 이번 사건을 두고 미국 언론은 대중 강경파인 나바로 국장의 돌출행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 대사관은 의견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나바로 국장 발언이 나온 후,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을 비롯한 백악관 주요 관계자는 미·중 무역협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커들로 국장은 대중 온건파로 분류된다.

나바로 국장 발언은 다분히 대선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 “11월 대선이 ‘일자리, 중국, 법과 질서’라는 세 가지 이슈로 귀결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무역협상을 끝내겠다는 결정은 이 세가지 이슈 모두를 노린 것, 특히 중국”이라고 덧붙였다. 미 대선을 앞두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샅바싸움’이 격해지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변동성에 취약한 증시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금융시장은 코로나19 재확산 우려와 경제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각국 중앙은행들이 풀어놓은 유동성의 힘으로 비이성적인 장세를 연출하고 있다. 지난 22일 나스닥 지수는 1만선을 탈환했고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지수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전형적인 ‘유동성 장세’다.

홍콩의 캐나다 임페리얼 상업은행의 아시아 거시전략 책임자인 패트릭 베넷은 “시장 유동성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시장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먼저 움직이고 그 다음에 해석을 하는 식으로 반응한다”며 작은 이슈에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미국의 정치상황 변화에 따라 시장이 반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오는 9월 30일에는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마련한 채권구입프로그램(SMCCF) 만기가 다가온다. 연준과 미국 재무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연장할 수 있지만, 최근 미국 의회에서는 연준과 재무부의 구제 프로그램이 대기업에만 집중된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앞으로 주가가 올라가고 회사채 등에 대한 자금이 쏠릴 수록 의회가 연준의 권한을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

BNP파리바 증권의 나카조라 마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앞으로 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는 정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