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광복군]"친일파·가짜 유공자 득세…역사 알아야 진실 보여"

by최훈길 기자
2015.08.12 06:30:00

임시정부 가족들 해방때까지 버틴 건 김구 선생 덕
중국서 독립운동 하던 인사들 귀국 후 따돌림 당해
친일파 후손·가짜 독립운동가 득세해온 광복 70년

[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친일파, 엉터리 독립유공자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선조 때부터 중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해온 독립운동가들과 자손들은 지금도 홀대를 받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 분들도 계시는데 제가 독립유공자라며 후손들에게 조언을 한다는 자체가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광복군 중 한 명인 이윤철(90) 지사는 광복 70주년을 맞은 소회를 묻자 이같이 말했다. 그는 오늘날 국무위원격인 임시정부 의정원 이광 의원의 아들이다. 그의 본가, 처가에는 민필호·김준엽 등 독립운동 유공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독립운동 후일담 요청에는 손사래를 쳤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 했을 뿐 꺼내놓고 자랑스레 떠들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경기도 시흥시 요양원 부근 카페에서 이 지사를 만났다. 그는 2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안타까움과 죄송스런 마음을 내비쳤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항일투사들이 광복 이후 쇠락해 가는 과정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이 지사는 “임시정부는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아래 남녀노소의 차별없이 평등했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고 탄식했다.

이윤철 광복군 지사(사진=최훈길).
어릴 적부터 독립운동을 해온 이 지사는 친일파가 득세해온 현실에 무엇보다도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지사의 선친 이광 의원은 1910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고 이후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했다. 그의 가족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요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1925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해온 가족들을 보면서 자랐다. 자연스레 독립운동은 그의 사명이 됐다. 중국어가 유창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부모의 첩보활동을 도왔다.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독립군 요원들은 가족단위 점조직으로 활동했습니다. 발각되지 않게 첩보활동을 하는 유랑 생활의 연속이었죠. 어머니는 유랑 중에 저를 출산하셨어요. 아무 도움도 받을 수가 없어서 혼자 탯줄을 자르셨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흰 구두를 먹물로 칠해 위장하고 첩보활동을 할 정도로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유랑 생활을 하면서도 신났다”고 했다. 일본과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제 나라를 찾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년이 된 이 지사는 광복군 5지대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42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인재 양성 계획에 따라 항공통신군관학교에 입교했다. 1945년 5월에 졸업과 동시에 사천성(四川省) 신진(新津) b29기지에 배속돼 전선 출격 작전을 지원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광복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김구 선생 덕분이었다고 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자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동포 등 각계각층의 지원이 전면 중단됐다. 김구 선생이 장개석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가족들은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김구 선생은 모든 면에서 참 모범적인 분이셨다”며 “동포애가 크신 분”이라고 했다.



그는 6.25 전쟁 때 귀국해 평양 작전에 참전하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되찾은 나라는 그가 기대했던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치하에서 특히 김구 쪽 임시정부 요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반민특위가 실패하면서 일본에 붙었던 이들은 득세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윤철 광복군 지사가 1951년 공군 시절 국내 최초로 건설된 관제탑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사진 제공=이윤철).
새로 구성된 정부에 중국 등 해외에서 잇따라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는 “광복 소식을 듣고 꿈만 같았는데 광복 이후에 나는 요샛말로 ‘왕따’였다. 선친 때부터 중국에 있다 보니 학연, 지연, 혈연 모두 끊겼다”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다른 독립운동가 가족들 중 상당수도 내 처지와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1990년에야 광복군 활동 등을 인정 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기 시작한 뒤로도 그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일제 강점기 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던 일부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됐고 이 신분을 이용해 사익을 챙기려는 모습을 자주 목격해서다.

그는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도 몇 달간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만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에 사리사욕, 명예욕에 눈이 멀어 이권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만 살펴봐도 ‘엉터리 독립유공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선정 과정을 다시 전면 재점검해야 합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당부했다. “시대가 변해도 내가 서 있는 우리 땅의 역사는 반드시 알았으면 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역사를 바로 알면 진실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