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 코미디까지?… 체호프의 숨겨둔 익살

by양승준 기자
2013.07.01 08:08:49

연극 '14인 체홉'
7일까지 동빙고동 프로젝트 시야
8월17일부턴 대학로예술극장

안톤 체호프 단막극 ‘백조의 노래’(사진=프로젝트박스 시야)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술을 퍼마셔 입안에 혀가 12개가 되는 것 같다. 한심해. 이런 얼간이 같으니.” 텁수룩한 머리. 셔츠 단추마저 잘못 끼운 모습이 너저분하다. 배우 박정자(71)는 텁텁한 목소리로 70대 남자배우를 연기한다. 깜깜한 무대 뒤에서 자신의 연극 인생을 되돌아보며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는 모습이 애달프다. “일흔이면 교회 다니며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난 이렇게 욕지거리니….” 박정자는 비애와 광기를 오가며 단막극 ‘백조의 노래’를 이끈다. 50년을 무대에서 산 노배우의 현실이 역할에 포개진다. 묻혀 있던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단막극이 노배우의 관록을 입고 부활했다.

‘14인 체홉’은 체호프가 남긴 단막극 중 다섯 작품을 모은 옴니버스 식 공연이다. 박정자·박상종(‘백조의 노래’), 김태훈·구도균(‘담배의 해로움에 대해’), 최용민·유준원·전미도·이은·이창훈(‘청혼’), 서정연·정수영·김태근(‘곰’), 박호산·우현주(‘불행’)등 14명의 배우가 저마다의 개성으로 색을 입혔다. 제목이 ‘14인 체홉’인 이유다.

공연은 짧지만 강렬하다. 세 시간이 넘는 체호프의 장막극과 비교할 때 집중이 쉽다. 게다가 유머까지 겸비했다. ‘곰’은 코미디를 연상케 할 정도다. 극중 젊은 과부는 평생 수절을 해 바람둥이였던 죽은 남편에게 순결함을 보여줘 복수를 하려 한다. 이 꽉 막힌 젊은 과부와 죽은 남편에게 돈을 빌려준 젊은이가 벌이는 갈등이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그러다 막판에 서로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황당면서도 재치가 넘친다. 실제로 공연 중 관객들의 폭소가 여러 번 터졌다. ‘세 자매’ ‘갈매기’ 등 체호프 장막극에서는 볼 수 없는 유쾌한 풍경이다. ‘무거운’ 체호프는 없다.



감각적인 무대가 인상 깊다. 분장실을 무대 위에 노출해 배우가 작품 캐릭터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준 게 신선하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짜릿하다. 잘 보이지 않는 곳도 ‘살아 있다’. 무대에 장막처럼 처진 실커튼 뒤에는 여행가방과 책상, 의자들이 엉켜 있다. 세월이 쌓인 듯 겹쳐 있다. 이를 배경으로 배우들이 번갈아 무대를 오가며 삶을 얘기한다. 오경택 연출은 “삶은 여행과 같다”며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주인은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세트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은 어려운 과정이다. 풀어내는 과정은 ‘산 넘어 산’이었다. 분량이 짧다고 쉬운 게 아니다. 작품의 색깔이 저마다 다르다보니 이를 자연스럽게 잇는 과정이 고됐다. 가벼운 듯 인간의 모순적인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체호프의 대본을 무대로 옮기는 것도 어려웠다. ‘체호프 통’이라 불리는 오 연출도 “너무 고생했다”며 웃었다.

‘14인 체홉’은 7일까지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공연한다. 장소를 옮겨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안톤 체호프 단막 연극 ‘곰’(사진=프로젝트박스 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