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원고…여성문학 개척자들의 고뇌

by오현주 기자
2012.09.20 08:19:01

'글을 담는 반짇고리: 나혜석에서 박경리까지' 전
모윤숙·박경리· 한무숙 등
근대 여류문학 이끈 작가 13명
사진·편지·생활용품 등 전시

어린 박경리와 어머니(사진=영인문학관)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3월 어느 날 오후. 라비! 우체부가 소포와 편지를 전해주고 갔음니다. K. S. T. 친구들의 편지들 속에 당신의 편지도 발견이 되었음니다. 친구들의 편지는 뒤로 미루고 당신의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뜨덨음니다. 뜯다가 내 손은 멈추었음니다.”

모윤숙(1910∼1990)의 ‘렌의 애가’다. 렌이 부르는 슬픈 노래. ‘렌’은 아프리카 밀림지대에서 홀로 우는 새를 말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향한 절절한 내면이 렌의 눈과 입을 통해 형체를 갖췄다. 작품은 1936년 잡지 ‘여성’에 연재된 후 이듬해 장편산문집으로 출간된다. 바닥에 깔린 비애감이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을 넘으며 보다 대중적인 통속성과 연결됐다.

그러나 작품은 70여년 전 시대상을 품은 감성충만한 문학의 역할을 넘어선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 여류작가가 생존의 방편으로 써내려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전 1920년대 근대의 배경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20년대 화가로 또 문인으로 ‘신여성’의 경지를 연 나혜석(1896∼1948), 김명순(1896∼1951) 등이 결국 행려병자와 정신병자로 떠돌게 된 사연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이를 목도한 30년대 작가 모윤숙과 최정희, 박화성과 노천명 등은 선배들이 외친 ‘자유’란 구호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한다. 내실화다. 시도는 성공한 듯 보였다. 두툼히 쌓은 밑거름은 40년대 한무숙과 전숙희, 강신재로, 또 50년대 김남조와 박경리로 이어지며 종내는 한국문학에서 ‘여류’라는 말을 빼버리는 근간이 된다.

근대 여명기에 여성으로 살며 현대문학의 판을 깐 13명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 ‘글을 담는 반짇고리’란 테마 아래서다. 1896년생인 나혜석부터 1927년생인 김남조까지 아울렀다.



아내와 어머니로 살았던 일상, 시대와 조화 혹은 불화한 작품 면면이 ‘이름표’로 존재를 대신한 작가의 흔적으로 펼쳐졌다. 편지와 사진, 초상화와 서화, 원고와 저서, 문방사우와 생활용품 등 가히 박물관 급이다. 나혜석이 남편 김우영과 유럽여행을 떠날 때 찍은 사진, 한무숙의 오래된 ‘싱거 미싱’, 박경리의 찻잔과 재떨이, 박화성의 허리끈, 강신재의 액세서리 등이 보인다. 캐나다에서 날아왔다는 모윤숙의 한복이 그가 집필할 때 쓰던 책상, 스탠드와 오랜만에 조우했다.

남편 김우영과 유럽여행 떠날 때 나혜석(사진=영인문학관)


무엇보다 육필원고가 귀하다. ‘3월 어느 날 오후…’로 시작된 ‘렌의 애가’ 원고엔 ‘2회’분이란 명시가 선명하다. 1969년 시작해 1994년 완간된 대하소설 ‘토지’의 서문들도 나왔다. 집필의 고통이 덧대인 박경리(1926∼2008)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난다. 한때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배수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1979). 그러나 이후의 회고는 더욱 적나라하다. “그 해 작품을 끝낸 8월15일 그 순간에도 해방감이나 성취감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멍청했을 뿐이다. 허허벌판, 폭풍이 몰고간 25년 세월이 끔찍해 그랬을까”(2001). 최정희의 ‘전화’ 일부, 한무숙의 ‘역사는 흐른다’ 일어원고 전문, 김남조의 ‘사랑초서’ 원고 전문도 나왔다.

여성작가가 드물던 시절 아닌가. 색 바랜 흑백사진 한 컷에 함께한 이들은 애잔한 정지다.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전시는 격동의 시대상을 투영하는 것이 목적이다. ‘맨발로 정상까지 기어오른 딸들을 기리기 위해서’란 비장한 전제가 붙었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11월3일까지. 02-379-3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