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계급 연봉]"행복은 연봉巡이 아니잖아요"
by채상우 기자
2014.10.13 07:30:00
고액 연봉 대신 꿈 찾아 나선 행복한 3인방 인터뷰
"남들이 원하는 인생 말고 스스로가 행복한 일 찾아야"
"꿈을 찾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
[이데일리 최선 고재우 채상우 기자] 돈이 권력이고 능력인 우리 사회에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 물질적 풍요와 안정된 직장을 포기한 사람들을 몽상가나 혁명가처럼 여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박차고 새로운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꿈을 이룬 후 행복을 얻었다고 입을 모은다.
22살 때 그는 늦깎이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한양대 의대에 입학했지만 “의사가 과연 나에게 맞는 일인가”라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2004년 3월 어느 날 의대 3학년이던 그는 수업 도중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의대에서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몰래 어머니의 도장을 파 자퇴서를 낸 뒤 집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진정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음식점 불판닦이부터 우유 배달, 길거리 노점상까지 세상과 부딪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케이블TV에 나온 영국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의 모습에 반해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2008년 ‘내일은 요리왕’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가 1위를 차지, 유명 인사가 됐다. 엠베서더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이상민(여·34)씨 얘기다.
그는 “요리사이자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고 있습니다. 연봉은 적지만 일한 만큼 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생각했다면 의사로 남았겠지요. 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꿈을 이뤘을 때 얻은 기쁨은 그 무엇보다도 큽니다.
락 밴드 ‘브로큰발렌타인’의 보컬 김경민(33) 씨. 그는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2001년 홍익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그의 인생이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음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음악 빠진 김씨는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다는 꿈을 가졌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졸업 후 외국계 기업인 P&G에 입사했다. 신입 초봉이 4400만원이었다.
가족들은 축하했고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사표를 던지고 전업 아티스트의 길에 뛰어 들었다. 가족은 물론 밴드 멤버들마저 반대했지만 ‘꿈의 포로’가 된 김씨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회사를 떠난 뒤 안정적인 삶은 끝났다. 2008년 아시안비트 야마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아티스트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배고픈 인디밴드다.
“주변의 기대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어요. 꿈을 포기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내가 행복할 때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한 것입니다.”
유명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억대 연봉을 받다 2011년 11월 사회적 기업 ‘열린옷장’을 창업한 김소령 대표는 ‘건강한 행복’을 위해 지금의 길을 택했다고 했다. 이전까지 그의 인생은 가족이나 자신의 사생활보다는 늘 일이 우선이었다. 일상에 지쳐갈 때쯤 사람들과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은 곧 꿈이 됐다. 물론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다보면 종종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딪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동료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김 대표가 꿈을 이루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로 ‘좋은 사람’을 꼽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 대표는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이 꿈을 이루는 가장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좋은 사람들과 건강한 에너지를 나누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꿈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해요. 초등학생들의 꿈이 공무원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남들의 꿈 말고 자기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