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한세실업 첫 여성 CEO…산전수전 다 겪은 '패션 외교관'
by이윤화 기자
2020.04.06 05:45:00
조희선 대표, 외교관 꿈 대신 글로벌 시장서 K패션 알리고 전문성 쌓아
리앤풍·메이百·홈플러스 등 거치며 ''유통업 첫 女 임원'' 타이틀
1월 한세실업 대표 취임, 오너家 김익환 대표이사와 협업 기대
| 조희선 한세실업 대표이사가 한세실업 본사 회의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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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윤화 기자] “어린 시절 외교관이 꿈이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K패션을 알리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조희선 한세실업 대표는 한국 패션업계에서 ‘여성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지난 2017년 한세실업에 합류한 뒤 2년 만에, 전문경영인으로는 처음으로 ‘여성 대표이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여성임원 비율이 50%가 넘는 한세실업 내에서도 창립 38주년 만에 이뤄진 파격적 인사였다.
한세실업은 지난해 7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 여성 임원 현황’에서 비율 50%로 1위에 올랐다. 조사대상 기업의 평균 여성 임원 비율은 3.6%로, 이보다 15배나 높은 수치다.
대표 취임 석 달 만인 지난달 31일, 서울 여의도 한세실업 본사에서 만난 조희선 대표는 “패션 업(業)의 특성상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경영인으로 대표 자리에 오르는 건 또 다른 문제”라면서 “수 십 년 동안 다양한 유통 및 패션 회사를 거치면서 쌓은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조 대표는 올해 초 한세실업 대표에 오르기까지 약 36년간 국내외 패션회사를 거치며 쌓아온 내공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제조부터 구매, 유통·판매 등 패션업계 전반의 시스템을 꿰뚫고 있는 것은 물론 외국계 회사 근무 경력으로 글로벌 패션 트렌드와 경영 시스템 등에 대해 익숙한 것도 그의 경쟁력이다.
패션업계 첫 경력은 의류 및 액세서리 분야 글로벌 소싱 업체 PBMS(Pacific Buying & Marketing Service Ltd.)에서 쌓았다. 1984년 입사해 7년 간 일하면서 리즈 클라이본(Liz Claiborne), 다나 부크만(Dana Buchman) 등 당시 미국에서 가장 ‘핫’ 했던 패션 브랜드의 구매를 담당했다. 이후 홍콩의 세계적 무역회사인 리앤풍 본사와 미국·한국 지사에서 근무했고, 미국의 메이 백화점에서는 한국 구매 총괄 담당으로 11년 간 일했다. 테스코 시절인 2008년엔 홈플러스 패션 부문 전무로 상품 본부장을 맡았다. 유통업계 최초의 여성 임원 배출 사례였다. 한세실업 직전에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근무했던 약진통상은 칼랄 그룹 소유의 의류 제조·수출 전문 회사로 한세실업과 업태가 가장 비슷한 곳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외교관이 되는 것보다 외국계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우먼파워를 발휘할 여지가 더 크다고 봤다”면서 “외교관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제무대에 서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외국계 패션 기업을 거치면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시간 패션업계에 종사한 만큼 잊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고되고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악바리 근성’으로 맡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았다. 메이 백화점에서 한국 구매 총괄을 담당할 당시 혼자서 이민 가방 20개 분량에 달하는 샘플을 미국, 한국, 대만 등 쇼가 펼쳐지는 각 나라로 운반해야 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세관 통과가 수월하지 않은 때가 허다했고, 항공사에서 짐을 실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업무를 포기하거나, 본사에 도움을 청했을 테지만 그는 엉엉 울면서도 한국 승객들에게 짐을 하나씩 부탁하면서까지 맡은 일은 스스로 해냈다.
또 한국 패션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K패션의 위상이 지금부터 높지 않았던 10여 년 전부터 우리 패션 산업의 잠재력을 확신했다. 메이 백화점 근무 당시 해외 바이어들은 이탈리아 원단에 비해 한국산 원단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지만, 그는 회장에게 직접 제일모직의 원단 우수성을 설명하고 처음으로 100만 야드를 매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패션 산업과 함께 성장해온 조 대표의 경영 능력은 한세실업에서도 빛을 냈다. 지난 2년 동안 영업부문장(부사장)으로 일하면서 해외 브랜드 캡(GAP), 폴로(POLO) 등 다양한 브랜드를 맡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조업자개발생산(ODM)부터 유통까지 전 과정을 총괄해왔다. 그 과정에서 수익성이 높은 ODM 비중을 늘리고 한세실업 자체 연구개발(R&D)을 통해 만든 특수 원단과 디자인 등을 앞세워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일명 ‘뽀글이’, ‘플리스’로 불리는 셰르파(Sherpa)에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해 시장경쟁력을 넓혔고, 기능성 소재로 만든 러닝복 역시 사계절 내내 사랑받는 아이템이 됐다.
이렇게 해외 브랜드 고객사들과 원단 개발 단계부터 디자인까지 협력을 강화하고, 생산량도 점차 늘려갔다. 그 결과 한세실업은 지난해 매출 2조1000억원을 기록, 목표 성장률 25%를 초과 달성했다.
| 조 대표는 한세실업이 코로나19 사태 이후의 상황을 차근차근 준비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사진=방인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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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세실업의 목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전체 패션 산업에 악재가 닥친 상황에서도 성장을 이어가는 것이다. 2029년 매출 3조원 달성을 목표로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 등 시장 다변화에 나선다. 자라(ZARA), H&M 등 글로벌 브랜드들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맺고 신규 바이어 개척에 나설 계획이다.
조 대표는 “미국 시장 의존율이 높은 상황에서 현재 미국·유럽권의 코로나19 확산세를 감안하면 올해 어려움이 예상되는 건 맞다”면서도 “38년 간 쌓아온 한세실업의 업력과 탄탄한 재무구조로 ‘포스트 코로나19’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세계 각국 현지 상황에 따라 주문량이 급변해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자동화 시스템을 이미 구축한 것은 물론, 중장기 목표로 세운 ‘스마트 팩토리’ 구축에도 매년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또 개별 브랜드에만 의존하지 않고 고객사에 라이프 트렌드에 맞는 상품을 제안할 수 있도록 R&D 부문 투자도 늘려갈 예정이다.
조 대표는 기술적이고 정량적인 시스템 개선에 더해 김익환 대표이사(부회장)와도 ‘환상의 케미’를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김익환 대표는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의 차남이다. 그동안 스마트 팩토리 등 공장 선진화와 친환경 경영을 실천하며 조 대표와 협업해 한세실업을 이끌어 왔다.
조 대표는 “김 부회장님은 스마트 팩토리와 같은 중장기적인 목표와 경영·영업 지원 본부를 맡고, 저는 나머지 영업·품질 관리, 상품 개발 등을 담당한다”면서 “지난 2년 간 함께 일하면서 차분하고 목표지향적인 성향이 비슷해 성과가 좋았다. 앞으로도 가족애 못지않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