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정병묵 기자
2020.04.03 02:11:00
표창원 국회의원(전 경찰대 교수) 심층 분석·진단
예고 됐던 n번방 사건, 언제든 일어날 범죄였다
빨간 마후라·소라넷·일베, 왜곡된 性가치관 만연
코로나19 처럼 심각성 인지하고 ‘전수조사’ 했어야
모든 관련자 강력 처벌…근본적 변화 교훈 얻어야
[표창원 국회의원·전 경찰대 교수] 조주빈(25) 검거로 텔레그램 ‘박사방’을 비롯한 ‘n번방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조주빈은 아르바이트 등을 미끼로 피해자들을 유인해 얼굴이 나오는 나체사진을 받아낸 뒤 이를 빌미로 성착취물을 찍도록 협박하고 박사방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조주빈을 포함한 공범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지시에 응하지 않으면 직접 찾아내 위협했다. 구청 혹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사회복부무요원도 공범이었다. 이들을 통해 피해 여성의 개인정보를 빼돌렸고, 협박과 강요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확인됐다. 박사방 유료회원 출신으로 성착취 영상 공유방을 별도로 운영하던 ‘태평양’은 불과 16세였다.
‘소라넷’,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등 우려스러운 병적인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이번 n번방 사건처럼 불법 성착취물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1997년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빨간 마후라’ 사건 이후 왜곡된 성적 가치관을 온라인상에서 공유한 사람들은 많았다. n번방 사건의 전모가 점점 밝혀지자 국민들이 받은 충격이 적지 않은 듯하다. 범행 수법이 생소한데다 무엇보다 악질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 예고된 범죄였다. 전에 없던 게 새로 나온 것처럼 놀라는 이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수년 전 일베 사이트를 중심으로 왜곡된 성적 혐오글과 범죄 행위를 자랑하는 게시물이 만연했을 때부터 대응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잠시 시선을 돌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보자. 우리 정부는 비교적 일찍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전수 조사’로 대응했다. 아직 해외 입국 교민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각국 외신들은 한국 정부가 잘 대응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사태 초기 안일하게 대응했던 몇몇 선진국들은 뒤늦게 한국의 대응 역량을 배워야 한다고 하고 있다. n번방 사태 이전까지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마치 최근까지 코로나19 사태를 안일하게 본 나라들하고 비슷하다. 결국 큰 화를 부른 뒤에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급격하게 교정되고 있다는 점도 똑같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대단히 심각하게 간주, 대응해 왔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북미 다수 국가들은 이미 2000년대 중반 관련 법을 고쳐서 형량을 상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디지털 성범죄 처벌 수위는 글로벌 기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작년 ‘다크웹(IP주소 추적이 불가능해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영역)’에서 아동 음란물 사이트를 운영해 검거된 손모씨는 불과 징역 1년 6개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 사이트를 통해 ‘단순 다운로드’ 한 미국인은 징역 70개월에 처해졌다. 실제 수사·사법기관이나 국회를 포함한 공공영역에서는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그럴 수도 있지”, “남자들은 원래 그렇지 않느냐”는 잘못된 성관념과 수사·사법기관의 구시대적인 관행 속에서 범죄자들이 독버섯처럼 암약하는 방식이 진화했던 것이다.
조주빈을 비롯해 왜곡된 성관념과 사회의식을 지닌 n번방 가해자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누구일까. 아직 당국이 조사 중이라 이 범죄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지만 ‘일베적 세계관’이 그들을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범행에 사용된 방법과 피해자에 대한 가학적 태도를 보면 비뚤어진 성인지 감수성의 일베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 여성을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대상, 상품으로 보고 ‘노예’란 표현을 쓰면서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물건 취급했다. 수십억원 상당의 가상화폐가 거래된 점으로 볼 때 돈에 대한 강한 집착도 보이고 있다.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 없이 결과만 중요하다는, 도덕성이 제거된 물질만능주의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온라인의 익명에 숨어 팍팍한 현실을 대리만족했다. 무직으로 알려진 조주빈은 본인 정체성 상당 부분을 온라인상에 두고 있었다. 온라인에서만큼은 내가 대장이고 ‘조폭’이고 강자다. 아동 살해 모의와 유명인 대상 사기행각까지, 오프라인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온라인을 통해 모의했다. 그런 일을 해야 그들 커뮤니티 안에서 ‘리더’로 관심과 추앙을 받는다. 가상 세계속에서 자신 존재의 위력을 맛봤고 우월감, 강자라는 느낌을 탐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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