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빌려서 시작하는 재건축·재개발.."정비업체 채무관계부터 끊어야"
by전재욱 기자
2024.04.05 05:30:00
[''정비사업의 꽃'' 재건축 조합장의 세계]④
조합 사업비를 정비업체가 대여하면서 유착하는 사례 빈번
건설사가 특정인 키워 조합장 밀어주고 시공사 선정 시도
지자체 공공융자 좋지만 예산 부족해 현실적 한계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재건축·재개발 조합이 건강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돈으로부터 독립’이 선행돼야 한다는 데에 정비업계 이해당사자(조합, 시공사, 정비·철거·설계업체, 지자체)의 의견은 전적으로 수렴된다.
| 건설현장에 설치된 타워크레인 (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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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재건축·재개발 조합은 사업은 첫 시작 단계부터 비용이 든다. 소유주를 개별 접촉해 의사를 확인하려면 사람을 써야 하는데, 돈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다. 비용은 외부에서 빌려 충당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차입 자체가 아니라 차입금의 ‘출처와 성격’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해당사자로부터 직접 조달이다. 강남의 재건축 조합 임원은 “우리는 소유주 찬조금과 대여금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커오는 동안 이제껏 특별한 잡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조합이 이러는 건 아니다. 주민 개별적으로 금전적 여력이 달릴 수 있고, 초기 상호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지 않을 수도 있는 탓이다.
자금난을 겪는 추진위원회(조합)가 통상 기대는 곳이 정비업체다. 애초 조합은 전문성이 없어서 스스로 정비사업을 하지 못한다. 이런 터에 조합은 반강제적으로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정비업체)의 도움을 받는다. 건축사·감정평가사·법무사 등으로 이뤄진 정비업체는 동의서 걷기와 기본계획 수립부터 시작해 모든 사업 단계에 관여한다.
이런 정비업체가 전국에 수백 개고, 서울에만 193개(1월 기준)가 있다. 정비업체 간에 수주 경쟁은 사업비를 조달하려는 조합의 필요와 맞물려 관계가 형성된다. 관계가 어긋나지 않으려면 업체 입장이 반영돼 조합의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다. 이게 늘 조합원의 이익과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정비업체 임원은 “정비사업을 한다는 얘기가 돌면 사업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업체들이 조합에 접근하면서 관계로 이어진다”며 “개중에는 활동비 명목으로 현금이 오가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걸 ‘조합장 코를 꿴다’고 부른다”고 했다.
때로는 관계 형성의 선후가 바뀐다. 조합이 정비업체를 선정하는 게 아니라, 정비업체가 조합을 만든다. 건설사와 정비업체가 특정 지역에서 들어가 여론(정비사업)을 조성하고, 인물(조합장)을 키워, 조직화(조합)를 지원하는 식이다.
경기 성남의 재건축 조합원은 “A 건설사가 우리 지역에 사람을 풀어 자기에 유리한 인물을 조합장에 앉히고 시공사로 선정되려고 작업한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A 건설사는 내부 사정을 고려해 시공자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공을 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은 조합 내부에서 민·형사 사건으로까지 불거진 상태다.
이론상 조합이 특정 업체에 일감을 몰아주지 못한다. 도정법은 조합 용역 사업은 모두 공개 입찰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이론이 늘 현실에서 통하는 것은 아니다. 설계업체 종사자는 “입찰은 모든 업체에 열려 있지만, 입찰 조건은 특정 업체에 유리할 수 있다”며 “매출, 실적, 자본금 등 조건을 어떻게 설정할지는 조합장 마음”이라고 말했다.
사실 조합원이 조합 임원을 견제하면 그만이다. 주요한 조합 의사결정은 총회 의결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서울의 재건축 비대위 조합원은 “이르게 사업을 마무리하려면 되도록 조합 집행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여기는 조합원이 뜻밖에 상당수”라며 “조합 내부에서 자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벽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조합과 업체 간에 채무관계를 차단하면 폐단을 예방할 수 있다. 서울시 정비사업 융자금 제도는 이런 취지에서 마련돼 평가받는다. 2009년 시작한 사업은 찾는 조합이 많아 매해 마련한 예산이 부족하다. 원하는 모든 조합이 혜택을 보지 못하니 자금을 대줄 업체를 찾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