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안중근 '남자현'·해녀 독립운동가 '부춘화'…기억해야 할 이름들

by최정훈 기자
2018.08.14 06:00:00

독립운동가 뒷바라지로 헌신한 고(故) 허은 지사
여자 안중근 고(故) 남자현 지사
생존 광복군 오희옥 지사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고(故) 최용신 지사
해녀들의 독립운동 이끈 고(故) 부춘화 지사

[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을 출판한 이윤옥(60)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은 “압제의 시대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건국의 어머니들은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많다”며 광복절을 맞아 기억해야 할 여성독립운동가 5명을 소개했다.

고(故)허은 지사 사진.(사진=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제공)
고(故) 허은 지사(1907~1997)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다. 1922년 허 지사는 16살 나이로 이상룡 선생의 손자인 이병화 선생과 결혼했다. 허 지사의 집은 서로군정서의 회의 장소와 더불어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의 전초기지로 쓰였다. 이곳에서 허 지사는 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사서 독립운동가들이 입을 군복을 대량으로 만들었고 쉴 틈 없이 드나드는 독립군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등 조국의 독립쟁취를 위해 노력했다. 허 지사는 광복 후 1997년에 향년 9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동안 허 지사에 대한 독립운동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어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번 광복절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고(故) 남자현 지사 사진.(사진=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제공)
여자 안중근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故) 남자현 지사(1872~1933년)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씨가 맡은 ‘안옥윤’의 실제 모델이다. 남 지사는 46살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로 들어갔다. 남 지사는 1925년 일제총독 사이토를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이듬해 서울에 잠입했으나 경계가 삼엄해 포기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조사차 왔을 때 손가락을 잘라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보냈다. 남 지사는 1933년 일본대사관 무토부요시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중국인 거지 할머니로 변장해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남 지사는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단식투쟁을 했고 병보석으로 풀려난지 닷새만에 서거했다.



오희옥 지사 사진.(사진=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제공)
생존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인 오희옥 지사(1926~현재)는 부모가 독립운동을 했던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오 지사는 중국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일본군의 정보수집과 군인 모집 그리고 연극·무용 등으로 한국인 사병의 위무활동을 맡았다.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됐고 1944년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온 오 지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행사에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증언해왔다. 현재 오 지사는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고(故) 최용신 지사(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사진=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제공)
소설가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고(故) 최용신 지사(1909~1935년)는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최 지사는 경기도 안산에서 예배당을 빌려 한글·산술·재봉·수예·가사·노래공부·성경공부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4년부터 YWCA의 보조금이 끊어지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육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던 중 1935년 26살 나이에 과로로 숨졌다. 최 지사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날 500여 명이 최 지사의 상여를 뒤따르며 젊은 독립운동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고(故) 부춘화 지사 사진.(사진=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제공)
고(故) 부춘화 지사(1908~1995년)는 15살 때부터 물질을 배운 해녀로 제주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부 지사는 낮에는 물질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민족의식 교육을 받았다. 부 지사는 1931년 일제에 의한 착취가 극에 달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해녀들을 모아 투쟁을 시작했다. 일제는 해녀항일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운동 관련자 100여 명을 잡아가기도 했는데 부 지사는 해녀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경찰을 습격했다. 당시 부 지사는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자수한 뒤 유치장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출감 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가 1946년 귀국해 해녀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힘쓰다가 1995년에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