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세 트라우마’ 때문에…또 증세없는 복지 하나
by박종오 기자
2017.06.30 05:30:20
|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한 사무소에서 기획재정부 업무 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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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기획재정부는 지난 26일 정부 세종청사 기자실에서 긴급 브리핑을 했다. 정부가 미세먼지 관리 대책의 하나로 경유세를 올릴 수 있다는 여론이 확산하자 황급히 진화에 나선 것이다. 청와대도 이날 “경윳값을 휘발유 가격 대비 125%로 올리자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주장”이라며 강한 톤으로 반박에 가세했다.
문재인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지난 28일 예정했던 브리핑 계획을 취소했다. 애초 언론에 발표하려던 안건은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조세·재정 개혁기구’ 설치 방안이었다. 국정기획위 관계자는 “경유세 인상 논란 등으로 시기적으로 민감한 이슈라고 판단해 막판에 발표를 보류했다”고 전했다.
최근 한 주 동안 증세(增稅)라는 말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한 새 정부 면면이다. 국정기획위가 29일 발표한 ‘새 정부 조세 개혁 방향’에도 이런 성향이 그대로 녹아 들어있다.
이에 따르면 국정기획위는 올해 하반기 정부 내에 조세·재정개혁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소득세, 법인세, 부동산 보유세, 경유세 명목세율(법으로 정한 세율) 인상 등 민감한 증세 안건은 이 기구에서 논의해 방향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박광온 국정기획위 대변인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는 국민적 합의와 동의를 얻어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특위는 내년 6월 지방선거 이후 구체적인 증세 등 조세 개혁 로드맵과 추진 일정을 담은 보고서를 마련해 대통령과 국회에 전달할 계획이다. 사실상 증세 시기를 정권 중반으로 미루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세법 개정안은 발표 및 국회 법안 통과 이듬해부터 적용해 실제 세수로 연결되는 것은 법 개정 2년 후부터다.
이는 증세의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세금 인상이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1년 뒤로 다가온 지방선거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때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했다가 여론이 들끓었던 전례도 새 정부가 과감한 부자 증세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는 요인이다.
국정기획위 핵심 관계자는 “위원회 내 증세 반대 여론이 워낙 강해 법인세나 소득세, 보유세 등 증세 논의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고 전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치 국면에서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증세에 나겠다는 것이 타당한 측면도 물론 있다.
문제는 증세가 새 정부가 내건 복지 확대의 핵심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당장 문 대통령 대선 공약 201개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만 5년간 178조원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재정 개혁과 세입 개혁을 통해 각각 97조원, 81조원을 조달하겠다고 했었다.
박광온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공약 소요 재원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했다. 국정기획위는 이미 공약 재원 세부 조달 계획을 잠정 확정한 상태다. 국정기획위 관계자는 “특별한 증세 없이 기존 공약집에 있던 재원 조달 방안을 거의 그대로 옮겨놨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공약집에 담긴 세법 개정 과제는 고소득자 과세 강화, 고액 상속·증여 세 부담 인상, 자산가 자본이득 과세 강화, 대기업 법인세 비과세·감면 정비, 법인세 최저한세율 인상 등이다.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등 직접적인 증세는 가장 뒷순위였다.
|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29일 발표한 ‘새 정부 조세 개혁 방향’ 보도자료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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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정부가 본격적인 증세 없이도 천문학적 재원 조달이 가능하다고 한 것은 최근 예상보다 더 걷히는 세금(초과 세수)을 공약 재원으로 돌려쓰기로 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국정기획위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초과 세수 중 지방에 나눠줘야 하는 40%가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공약 재원으로 일정 부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기획재정부는 이달 초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변경 작성한 ‘2016~2020년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보면 정부의 국세 수입액은 애초 예측치보다 42조 2000억원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 이 세수를 공약 재원으로 끌어오면서 증세를 늦출 여력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는 일종의 ‘꼼수’라고 지적한다. 초과 세수란 엄밀히 말해 정부 예측보다 더 들어오는 세금일 뿐, 추가 수입이 생기거나 지출 여력이 커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초과 세수가 발생하는 것은 정부가 애초 세금 수입을 보수적으로 전망한 영향도 크다. 기재부에 따르면 정부가 초과 세수를 쓰지 않고 그대로 곳간에 쌓아둬도 실질적인 나라 살림(관리재정수지)은 내년 14조 7000억원, 2019년 12조 2000억원, 2020년에는 8조 3000억원 적자가 날 전망이다.
이런 방침은 공약과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당초 “공약 이행으로 추가되는 소요 재원은 별도의 재원 조달 방안을 마련해 재정 건전성 악화를 방지하겠다”며 정부 전망을 웃도는 세수 증가분을 공약 이행 재원에 포함하지 않았다.
증세에 소극적인 태도가 향후 복지와 재정 지출 확대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돈줄 없는 지출 확대는 나랏빚 부담을 키운다는 여론 공격을 받을 수 있어서다. 문 대통령 측은 대선 당시 정부의 재정 지출을 매년 7%씩 늘리겠다고 공언했지만, 구체적인 증세 안이나 재정 수지 목표는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가 신설하려는 조세·재정 특위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는 시선도 있다.
이 특위는 참여정부가 종부세 파동 직후인 2005년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한 ‘조세개혁특별위원회’를 본뜬 것이다. 당시 특위도 중장기 조세 개혁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야심 차게 가동했지만, 논란만 부르다 증세 등 실제 개혁 방안은 발표조차 못하고 흐지부지된 바 있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가 직접 증세에 나서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만큼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모델을 만들자는 기본적인 방향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참여정부 당시 조세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당시 특위가 제 기능을 못 한 것은 실무적 전문성이 없는 인사가 모여 이념적인 얘기를 주로 했기 때문”이라며 “최소한 자기 세금 신고 정도는 직접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꼭 명목세율 인상이 아니더라도 부가가치세 면세 축소, 단기 주식 매매 차익 과세 강화 등 조세 체계 전반을 선진화해 세수를 확보할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며 특위 초점이 반드시 증세에만 맞춰질 필요는 없다고도 조언했다.
증세 등 세입 개혁 외에 공약 재원을 조달할 또 다른 주요 수단인 재정 개혁도 실효성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 해 정부 예산의 4분의 1 규모가 구조조정 도마 위에 올랐으나, 재원 절감에만 방점이 찍혔을 뿐 구체적인 방법이 분명치 않아서다. 국정기획위 관계자는 “기존 복지 예산을 정비하고 대기업에 지원하던 연구·개발(R&D) 예산을 중소기업으로 돌리거나 대선 공약인 4차 산업혁명 지원 예산으로 전환하는 방식 등을 통해 공약 이행 재원을 마련키로 했다”고 말했다.
옛 기획예산처 차관을 지낸 정해방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약 소요 재원을 만들기 위해 국가가 하는 일을 조정하겠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얘기”라며 “산업 지원 방식 등 국가의 역할에 대한 사고와 시각을 먼저 바꿔야 기득권투성이인 불필요한 예산을 큰 틀에서 개혁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