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그늘서 벗어나자"…각국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만지작

by이정훈 기자
2019.09.16 05:30:00

금융위기·트럼프체제에 달러패권 휘청…통화질서 위협
블록체인 등장에 페북 `리브라` 등 민간 암호화폐 도전
`분산원장+금융시스템`, 달러 없이도 결제 가능해져
CBDC 시간문제…금융안정·소비선호 높일 대책 필요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독자적인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통화(CBDC)` 도입을 준비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여론이 지난달 마크 카니 영란은행(BOE) 총재가 “각 국 중앙은행들이 발행하는 CBDC들을 하나의 바스켓으로 묶어서 관리하면 (미국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글로벌 기축통화를 만들 수도 있다”고 제안하자 기대 쪽으로 물꼬를 트는 모양새다.

디지털화폐 발행 이후 화폐 분류체계 (자료=금융연구원)
달러화 패권에 대한 도전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비상시에 대비한 신흥국들의 달러화 과잉저축이 꾸준히 성장을 저해하는 원흉으로 지적받아 온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장 이후 달러화 중심의 글로벌 통화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카니 총재가 지적했듯이 달러화 패권은 계속될 수 없다. 벌써 시스템 곳곳에서 균열이 드러나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트럼프 때문에 촉발됐는데도 이 때문에 불안해진 전세계 투자자들은 안전하다는 이유로 달러화 자산으로 몰린다. 금융위기 때마다 이는 더 심해지고 심각한 후폭풍을 낳는다. 조금만 불안해도 투자자들이 몰리는 탓에 달러화 가치는 빠르게 뛸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신흥국에서는 자본이 유출되고 채무불이행 위험도 커진다. 이를 막으려고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환율 방어에 나서고 금리를 높인다. 이러니 달러는 더 강해지고 미국 수출이나 기업들이 타격을 입는다. 결국 트럼프와 같은 보호무역주의자들이 득세하고 환율전쟁으로 전이된다.

이뿐 아니라 기술적 진보라는 또다른 도전도 있다. 각 국 통화당국과 금융감독당국의 견제에 잠시 주춤하곤 있지만, 일개 민간기업에 불과한 페이스북이 내놓은 `리브라(Libra)`라는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는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기존 금융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키우고 있다. 페이스북은 물론 텔레그램과 JP모건 등 방대한 유저와 인프라를 갖춘 민간기업들이 암호화폐를 상용화한다면 국가가 가지는 화폐 발행의 독점적 지위도 위협할 수 있다.

작년초까지 인민은행을 이끌던 저우샤오촨 전 총재는 리브라 현상을 목격한 뒤 “이 코인은 전통적인 국가 간 거래와 결제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화폐”라고 평가하면서 “중국 정부가 이에 맞서 위안화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인민은행이 이른바 `디지털 위안화`라는 CBDC 발행에 속도를 붙인 것도 바로 이런 판단 때문이었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지폐나 주화와 같은 실물 명목화폐(Fiat Currency)를 대체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발행하는 전자적인 명목화폐를 말한다. CBDC는 중앙은행에 직접 계좌를 개설하도록 하는 계좌형과 중앙은행이 보증만 하는 디지털토큰형으로 나뉘는데, 이 중 계좌형 CBDC는 은행을 비롯한 제한된 금융회사만 사용하도록 하는 지불준비금계좌와 개인예금계좌로도 구분된다. 어떤 유형이건 중앙은행이 검증된 분산원장 기능과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을 결합해 화폐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다. 예컨데 디지털 위안화의 경우 시중은행들이 인민은행에 디지털 위안화 전용계좌를 개설하고 1위안에 토큰 1개씩을 구매해 은행에서 개인계좌를 개서하는 개인 사용자들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특히 CBDC는 중앙은행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블록체인 상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 발행과 유통 등은 물론이고 (중앙은행이 거래 익명성을 보장하도록 선택하지 않는다면) 모든 금융거래까지 추적할 수 있다. 탈중앙화라는 암호화폐 가치와는 거리가 멀지만 CBDC 발행은 민간 암호화폐의 도전을 선제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중국 외에도 미국과 캐나다, 싱가포르, 터키, 스웨덴 등이 CBDC 실증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다.

더구나 각국 중앙은행 블록체인을 연결하는 크로스체인을 만들어 각 통화별 CBDC를 연결하는 합성패권통화(SHC)가 등장한다면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 물건을 팔기로 하고 탈중앙화한 에스크로계좌에서 CBDC를 자동으로 주고 받는 스마트계약을 체결한다. 한국 기업이 물건을 배송하고 나면 중국 업체가 입금한 위안화로 구입한 CBDC는 자동으로 전송되고 이를 받은 한국 기업은 원화로 바꾸면 그만이다. 이 경우 수출입 대금결제의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환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고 비싼 환헤지를 실시할 필요도 없다. 굳이 달러화를 이용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새로운 결제통화가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소비자들이 이를 채택하진 않을 것이다. 국가마다 현금이나 신용카드, 모바일 결제 등 결제방식이 다양한데다 익명성이나 수수료, 이자 등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 다 다른 만큼 그에 따른 맞춤형 설계가 필요하다. 디지털 위안화가 위챗페이나 알리페이 등을 대체하는 무현금·모바일 결제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기존 결제 인프라와의 호환이나 접근성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CBDC가 시중은행들의 요구불예금을 대체함으로써 은행들이 민간에 대출하는 신용 공급이 축소되는 등 금융 안정을 저해할 수 있는 위험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이 시중 통화량을 조절함으로써 신용 공급은 물론 투자와 소비 등 총수요를 조절하는 이른바 신용경로가 막힐 수 있다는 불확실성은 큰 걸림돌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하든 CBDC의 등장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부작용이나 불확실성을 보완하고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면서 단계적으로 CBDC 사용을 늘려가야만 디지털 결제 증가로 인해 쓰임새가 줄어들고 있는 기존 명목화폐의 빈 틈을 메울 수 있는 최적의 솔루션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