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성희롱·폭력에…여성소방관 멍든다

by최훈길 기자
2015.11.13 06:00:00

인권위 의뢰 고려대 연구진, 소방직 8525명 실태조사
일반인으로부터 언어폭력 51%·성희롱 20%·11%폭행 경험
신고율 낮고 후속조치 거의 없어..지방직 신분, 조직 문화 탓
남녀 소방 우울·불안·불면증, 일반인의 15~20배

[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사고현장에 출동한 여성 소방대원 10명 중 8명꼴로 일반인으로부터 욕설, 폭행, 성희롱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처벌 등의 후속 안전대책이 거의 없어 피해를 입고도 참는 소방관들이 대다수였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12일 고려대 산학협력단(김승섭 교수)에 의뢰해 전국 소방직 공무원 8525명(여성 508명)을 대상으로 지난 8~9월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한 여성 소방대원 중 51%가 언어폭력, 11.1%가 신체폭력, 19.8%가 성희롱을 일반인으로부터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 소방대원의 경우 응답자 37.9%가 언어폭력, 8.2%가 신체폭력, 3.3%가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남성보다는 여성 소방대원이 일선 현장에서 폭력에 더 많이 노출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폭력 신고율은 저조했고 후속조치는 거의 없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한 소방대원의 18.6%가 소방기관에 보고했고 8.6%만이 후속조치가 이뤄졌다. 언어폭력, 성희롱의 경우 각각 10% 이하만 보고됐고 후속조치는 1% 미만에 불과했다. 특히, 여성 대원의 경우 성희롱을 보고해도 이에 대한 소방기관의 후속조치는 한 건도 없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지방의 경우 인맥 관계가 좁기 때문에 지방직 신분인 이들 대원들이 폭력을 당해도 기관 차원에서 엄한 처벌을 요구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면서 “기관의 제대로 된 처벌이 없다 보니 보고율도 낮을 수밖에 없고, 여성 대원의 경우 남성중심의 조직 문화에서 더욱 피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119 구급대원이 환자에게 응급조치를 하고 있다.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출처=세종특별자치시 소방본부)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건강이 나쁜 편이거나 매우 나쁘다’고 응답한 소방대원은 10.2%에 달했다. 이는 일반 근로자(2.2%)의 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응답한 소방대원들이 겪는 청력문제(24.8%), 우울 또는 불안장애(19.4%), 불면증 또는 수면장애(43.2%)는 일반 근로자의 15~20배에 달했다. 일반인(11.2%)의 6배 수준에 달하는 대원 64.9%가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또 ‘지난 1년 사이에 자살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있다’고 답한 대원이 7.2%에 달해 일반인(1.7%) 수준보다 4배가 넘었다.

소방대원들이 각종 질환을 안고 있지만, 이에 대한 기관 차원의 대책도 유명무실했다. 정부는 소방공무원 보건안전 및 복지기본법에 근거해 소방관대원들을 대상으로 특수건강검진을 시행 중이다. 하지만 대원 91.1%는 ‘특수건강검진을 받아도 기관차원의 후속조치는 없었다’고 답했다.



구조장비, 치료비를 자비로 처리하는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응답한 대원 76%가 ‘개인안전 장비가 충분히 보급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33.2%는 ‘최근 3년간 장비 노후화 문제로 개인 안전장비를 자비로 구입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79.1%는 ‘지급되는 개인안전 장비의 품질이 안전을 보장하기에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이들은 안전장갑(26.1%), 기동화(18.7%), 공기호흡기(12.2%) 순으로 품질개선이 시급하다고 응답했다.

1일 이상의 요양이나 치료가 필요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는 소방공무원 1348명 중 173명(12.8%)만 공무상 요양을 신청해 승인 받았다. 이는 부상자 8명 중 1명꼴로만 요양승인을 받았고 나머지 7명은 자비로 치료한 셈이다. 출동 중 교통사고를 당해도 이들 대원 중 10명 중 7명(69.4%)은 병원비를 자비로 부담했다. 소방대원들은 △기관의 행정평가상 불이익(37.8%) △복잡한 신고절차(25.5%) △공무상 요양승인을 신청할 수 있는 부상 기준의 부재(25.0%) 등의 이유로 공무상 요양승인신청서조차 내지 못했다.

김 교수는 “소방공무원 전체를 아우르는 특별법 형태의 근로기준법 제정이나 복지기본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공무상 요양을 신청할 경우 불이익 처우가 가해지는 것을 금지하는 제도도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이 같은 실태 보고서를 토대로 국민안전처(안전처) 등 관계부처에 개선사항을 통보하고 90일 이내에 개선여부를 재확인할 계획이다. 안전처, 인사혁신처, 공무원연금공단은 이달까지 소방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고 제도개선 방안을 협의할 계획이다.

윤순중 안전처 소방정책국장은 “소방특별법 등 법 제정 부분은 부처 내부에서 논의된 적은 없어서 인권위와 협의가 필요하다”며 “인사처, 공무원연금공단과는 공상을 인정받는 범위를 현재보다 확대하는 방향으로 논의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