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윤영환 기자
2005.11.21 08:43:37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노벨상 발표 이후의 게임이론에 대한 높은 관심에 편승하여 소개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역시 크레딧 애널리스트에게는 보이는 것 모두가 신용분석 참고서다. 마침 고민하던 유동성리스크 이슈에 대한 절묘한 설명에 오롯이 눈길을 빼앗겼다.
<사례 1> A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의 하나다. 채권 만기를 장기화하고 충분한 유동성을 가져가며 시장과 활발한 의사소통을 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으로는 드물게 모범적인 재무정책을 펼쳐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A사 자금부서는 자금조달 단기화를 통한 금융비용 부담축소 요구를 받고 있다.
<사례 2> B사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적 기업의 하나다. 매년 특정 계절이 되면 매출채권이 크게 증가하며 이 자금의 상당부분을 기업어음(CP)으로 조달한다. 지난해 최대 발행잔액은 약 1.4조원이었고 금년에는 이를 상당수준 상회할 전망이다. 신용등급은 최고 수준이고 CP거래선과의 관계도 안정적이지만 유동성보장을 위한 특별한 장치는 없다.
<사례 3> C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신전문금융 회사로 카드위기의 어려움을 비교적 조기에 극복했다. 높은 단기자금 의존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경쟁구조와 금융환경을 감안하여 점진적인 접근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 금리상승에 따른 채권시장의 유동성 약화로 채권발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CP 등 단기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사례 4> D사는 우리나라의 유통혁신을 선도하고 있는 대표 주자다. 지속적인 성장전략과 탁월한 현금흐름이 어우러진 절묘한 사업모델로 내외의 찬사를 받고 있다. 각종 재무지표도 흠잡을 데가 없지만 유동비율만은 15%에 불과하다. 운영자금은 물론 투자재원의 상당부분을 매입채무와 단기차입(주로 CP) 등 유동부채로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5> 엔론사태 직후인 2002년 초 세계 최고의 제조업체 GE는 장기채를 CP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Bill Gross가 주도하는 시장의 공격을 받았다.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과 시장의 안정성을 해치는, 기업과 금융시장의 약속을 저버린 행위라는 것이었다. 채권가격은 폭락했고 GE는 3주만에 장기회사채 발행비중 확대와 CP에 대한 은행 크레딧라인 확충계획을 발표했다.
<사례 1~4>와 <사례 5>를 비교해 보면 우리와 미국 금융시장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커다란 관점의 차이가 보인다. 무엇보다 유동성리스크, 구체적으로는 CP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매우 크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먼저 공통점을 살펴보자. 우선 두 시장 모두 최근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대형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유동성리스크에 혼쭐이 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실 <사례 5>는 이런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사례의 기업들은 모두 그 시장의 대표적인 기업들로 투자자에게는 ‘믿을만한’ 거래 상대방이라는 점이다. 이는 이런 종류의 논의를 할 때 곧잘 부딪히는 벽이다. 신용등급도 높고 당국의 지원이 반드시 있을 것 같은 기업의 위험요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좀처럼 공감을 얻기 어렵다. 하지만 <사례 1~4> 기업들의 신용도가 어디 세계 최고의 제조업체 GE의 신용도에 비기겠는가? 그리고 항상 발등을 찍는 대형 사고는 믿는 도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례 1~4>의 구조는 게임이론의 대표적 사례, '죄수의 딜레마'와 매우 흡사하다. 죄수라는 말이 어감이 나쁘다면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게임의 종류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논리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으로는 모두가 협조(또는 공익 추구)할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다.
2) 개인적으로는 배신(또는 사익 추구)했을 때 가장 좋은 성과를 얻는다.
게임의 논리로만 보면 개인의 선택으로 배신이 최선이다. 이렇게 게임의 참가자 모두가 배신을 지배적 전략으로 선택하면서 최악의 내쉬균형(Nash equilibrium)을 이룬다. 모두 패자가 되는 상황이다. '무임승차'의 이슈나 '시장의 실패'가 모두 이렇게 설명된다.
언뜻 인간 사회의 미래는 암울해 보인다. 그러나 게임이론의 요체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보복'이다.
만일 '죄수의 딜레마'의 두 죄수가 강력한 행동강령을 가지고 있는 어떤 조직 소속이라면 어떻게 될까? 배신은 '짧은 행복, 긴 불행'을 의미한다. 지배적 전략은 협조가 되고 모두가 최선의 결과를 얻는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로 설명되는 보복은 사회(또는 조직)의 안정을 지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보복처럼 난폭한 수단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이나 정보공개와 같은 온건한 접근도 유사한 수준으로 협조의 비율을 높인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의 조합인 제도(법, 규칙, 관습)의 효율성이 조직의 성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례 5>가 돋보이는 것은 빌 그로스가 보복의 칼을 뽑았다는 점이다. 빌 그로스는 가장 유명한 채권 투자가다. 최대 채권펀드 운영자라는 배경이나 기인적 풍모보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사회 참여적 기질이다.
당시에도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지적은 있었지만 사회적 고민은 그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엔론 이후의 연쇄도산으로 기업회계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GE조차도 회계적 투명성을 의심 받고 있었다. 또한 평가사들은 유동성리스크 평가에 대한 취약성을 시인하고 대안마련에 나서고 있었다.
빌 그로스의 공격과 GE의 흔쾌한 승복은 이런 상황을 신속하게 정리하고 긍정적 균형을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유동성위기를 겪었지만 우리 시장은 이와 관련한 성찰이 별로 없다. CP거래정보 공개는 너무나 미흡한 수준에 그쳤고, 신용평가사는 여전히 유동성리스크 평가를 주저한다. 유동성보장과 관련한 상품개발은 요원한 상태다. 시장의 인식은 조금 높아졌지만 여전히 막연한 수준이다. 사실 정보도 없고 분석도 없으니 경각심이 생기기 어려운 것이다.
악화에 대한 응징이 없으면 악화는 반드시 양화를 구축한다. 배신을 배신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배신만 남고 협조는 자취를 감춘다. <사례 1>의 모범사례가 자취를 감추고 <사례 2~4>의 기회주의적 접근이 만연하면 시장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이전투구의 장이 된다. 잘해봐야 극단적인 홍수와 가뭄을 반복하는 천수답이다.
<사례 2~4> 기업들의 펀더멘탈이 정말 우수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공동체적 가치의 관점에서 먼저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들의 재무정책을 비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규범이 없거나 그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상태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칼럼리스트의 일갈이 생각날 뿐이다.
“뻔뻔함은 대중의 무지 위에 피어나는 독버섯이다”- 홍세화 -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 기업분석부 연구위원/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