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 장부 1장이 뭐라고’…노조-정부 극한의 자존심 싸움[이슈분석]

by최정훈 기자
2023.02.23 07:00:00

노조 회계 자료 제출 두고 노조와 정부 갈등 극한으로
실상은 줘도 그만인 회계 장부 1장을 둔 ‘자존심 싸움’
적폐 대상 될라…고용부와 노총 모두 내부는 ‘뒤숭숭’
“정권 바뀌면 문제 될 수도…노조도 성찰 필요해”

[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노동조합의 회계를 둘러싼 노조와 정부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이번 갈등의 실상은 회계 투명성과 큰 연관 없는 자존심 싸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와 노조의 자존심 싸움의 정치적 열매를 뒤로 하고 내부 직원들의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15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왼쪽)으로부터 부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노조의 회계 투명성을 보겠다고 정부가 의지를 보인 것은 갑작스러웠다. 지난해 12월 18일 한덕수 국무총리와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노조의 재정 투명성을 강조한 것이 시작이다. 직전까지 노조 회계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불거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의 발언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이틀 후 고용노동부도 “현행법 제도에 근거해 노조의 재정 투명성 확보를 위한 관련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며 노조 회계 갈등이 급물살을 탔다. 성탄절 다음날인 26일엔 이정식 고용부 장관이 직접 브리핑을 열고 1월 말까지 자율점검 기간을 거친 뒤 노조가 조치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율점검 기간이 끝난 후 고용부는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조합원 수가 1000명 이상인 단위노조와 연합단체 총 327곳에 회계 관련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고용부는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노조법이었다. 노조는 재정에 관한 정부와 서류를 사무소에 비치해야 하고, 행정관청이 요구하는 경우에는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용부의 자료 제출 요구 이후 실제로 정부의 요구에 따라 자료를 제출한 노조는 120곳(36.7%)에 그쳤다.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207곳 중 153곳은 자율점검 결과서나 표지는 냈지만 내지를 제출하지 않았고, 54곳은 자료를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결과 발표 이후 노조에 집중포화가 떨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치를 부정하고 사용 내역 공개를 거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고, 이정식 장관은 “재정에 관한 장부·서류를 비치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노조를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고, 이미 지급된 보조금에 대해서도 부정하게 사용됐을 경우 환수하겠다”고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양대노총은 정부의 회계 제출 요구가 노조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노동탄압이자, 노조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정부가 월권을 행사하고 노조 운영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민주노총은 “세액 공제와 보조금·지원금 중단 등 돈을 가지고 겁박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문제는 노조와 정부의 극한으로 치닫는 갈등이 ‘회계 장부 1장’을 둔 자존심 싸움이라는 점이다. 고용부는 애초부터 노조의 회계 장부 전체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단지 회계 서류의 표지와 수백 장에 달하는 내용 중 딱 한 장의 내지를 같이 보내라는 정도였다. 현행 노조법상으로도 고용부가 확인할 수 있는 건 회계 장부의 적절성이 아니라 장부가 사무실에 있는지 정도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고용노동부 제공
고용부 관계자는 “회계 장부 전체를 제출하라는 것도 핵심 내용을 사진 찍어 보내라는 것도 아니다”라며 “시행령에서 요구하는 예산서와 결산서, 지출결의서 등 각각의 항목에 내지를 단 한 장만 찍어서 표지에 맞는 내용인지만 확인해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노조 입장에서는 부담 없는 부분만 정해서 정부에 제출하면 되는 부분이었다”며 “심지어 제출한 내용 중 일부 내용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 블라인드 처리를 해도 된다는 안내까지 했다”고 전했다.



고용부는 시정 기간을 둔 뒤에도 제출하지 않으면 현행법에 따라 15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시정기간 및 과태료 부과 과정에서 수 차례의 출석 조사와 의견진술 기회에도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서류 비치·보존에 대한 소명도 없을 경우, 현장 조사도 병행한다고 말했다. 현장조사를 방해하거나 기피하면 500만원의 과태료도 부과할 계획이다.

노조 측은 표지 외에 내지를 제출하는 게 정부의 괜한 트집이라고 주장한다. 회계 장부 1장을 제출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정부의 과도한 요구에 응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노조가 행정관청에 결산보고를 하면서 회계 자료를 반드시 포함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의 국회 입법조사처의 해석도 근거를 들며 과태료 처분 시 소송에 나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회계 관련 자료 내지 한 장 제출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고, 실제로 정부가 요구하는 것 중 회계 자료 내지 외 모든 것을 제출했다”며 “그러나 내지 제출 자체가 법률적 근거가 없다”고 전했다. 그는 “법률적 근거도 없는 부분을 요구하는 것은 정부가 노조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이라며 “내지를 요구하는 의도 자체를 불순하다고 본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말 잘 듣는 노조와 그렇지 않은 노조 구분하려는 의도 명확하고, 이번 요구를 들어주면 더 한 요구를 해올 것이 분명하다”며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 사태부터 노조를 고립시키고 망신 주며 정권의 지지율 상승 도구로 활용하려는 것에 동조할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노조는 줘도 그만인, 고용부는 받지 않아도 그만인 수준의 회계 장부 1장을 둔 극한의 자존심 대결의 끝은 어디일까. 이번 대결이 각각의 조직 누군가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성공할지 몰라도, 극단적 갈등의 당사자인 노조와 고용부 내부 구성원들의 마음은 뒤숭숭하기만 하다.

20일 오전 서울 민주노총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노조활동 부당개입, 노조탄압 규탄 민주노총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특히 가속도는 내고 있는 노동개혁을 담당하는 고용부의 내부에선 문재인 정권 초기 적폐 청산의 기억을 떠올린다. 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박근혜 정부 시절 노동개혁 추진과 노동계에 대한 탄압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라는 적폐 청산 위원회를 출범시켜 진상조사를 벌였다.

위원회는 박근혜 정부가 비선 기구를 운영해 행정권을 남용하면서 노동개혁을 추진했고, 민간인 사찰을 벌여 개혁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용부 공무원 다수가 조사받았고, 수사 의뢰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아주 위법한 사항이 아닌 다음에서야 위에서 내려온 지시는 수행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과거의 사례가 있어 돌다리도 두드려보면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귀뜸했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조를 지나치게 적폐 세력화하고 문제 삼는 게 상식선이면 공무원이 불안해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라며 “노동계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비리에 대한 적법성이 현 정부 아래에서는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또 다른 정권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조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실제로 노조에 대한 날 선 대응이 있을 때마다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반노조 정서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만큼, 조직에 대한 미래가 불안스럽게 느껴진다는 게 내부 반응이다.

양대노총 소속 한 관계자는 “노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며 “가뜩이나 MZ 노조 등의 출범으로 대안 세력까지 등장하면서 우리 조직도 바뀌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고 털어놨다.

이 교수는 “지금의 반노조 정서는 통계청 조사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 부분”이라며 “노조가 왜 국민에게 질타받고 신뢰 얻지 못하는 걸 돌아봐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국민이 등을 돌리면 노조는 고립되고 투쟁이나 입장 표현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