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삶의 쉼표를 주는 더딘 풍경 속으로
by강경록 기자
2020.05.01 06:00:00
슬로시티 예산 대흥에 가다
13m 남짓 ''느린꼬부랑길''
굽이굽이 흐르는 옛이야기
백제의 한 서린 임존성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등
| 봉수산자연휴양림 전망대에서 바라본 예당호와 대흥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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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대흥=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더딘 풍경으로 삶의 쉼표를 주는 곳이 있다. 푸른 호수와 돌담길, 역사와 전통, 자연생태가 숨 쉬는 고장, 슬로시티 대흥이다. 대흥의 정확한 지명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예당저수지 주변을 아우르는 고장이다. 겉보기에는 자그마한 마을인지 몰라도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선사시대와 백제 부흥 운동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문턱 없이 넘나들며 슬로시티의 철학을 몸소 직접 체험했다. 봄이 무르익는 4월 말, 느린 걸음으로 대흥의 삶과 자연, 그리고 마을 사람과 역사의 자취를 마주할 수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삶의 지혜를 배우다
대흥이 가까워지자 예당호가 나타난다. 대륙의 바다처럼 넓고 푸른 호수다. 과거에는 아산만까지 배가 오갔으니 바다 냄새가 괜스럽지 않다. 응봉면 평촌삼거리부터는 예당저수지와 나란히 한다. 길가로 물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와 낚시꾼이 머무르는 좌대의 풍경은 또 다른 볼거리다. 그 한갓진 시간이 마냥 부럽다. 그렇다고 조바심낼 까닭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흥면 교촌리, 동서리, 상중리가 느림의 일상으로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대흥은 옛 대흥읍성이 있던 자리. 과거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봉수산 임존성 자락 아래다. 교과서에도 실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서 유래했다. 이 마을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느린꼬부랑길’을 걷는 것이 가장 좋다.
길은 세 가지 주제로 코스를 나눴다. 1코스는 ‘옛이야기길’이다. 방문자센터에서 출발해 배 맨 나무, 봉수산자연휴양림, 애기폭포, 대흥동헌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5.1㎞ 구간으로 약 90분 걸린다. 2코스는 ‘느림길’이다. 자연의 지혜로움에 귀 기울이며, 느리게 사는 삶의 의미를 만나는 길이다. 방문자센터에서 대흥동헌, 애기폭포, 대흥향교를 지나는 원점 회귀 코스다. 4.6㎞ 구간으로 약 60분이 걸린다. 3코스는 ‘사랑길’. 대흥향교 앞 수령 600여 년 된 은행나무 때문에 붙은 주제다. 이 은행나무의 별칭은 ‘사랑나무’다. 이 나무에 느티나무 뿌리가 내려 150년간 한 몸으로 살고 있어서다. 방문자센터에서 이한직가옥, 대흥향교, 삼신당 터, 망대할아버지석상까지 이어진다. 3.3㎞로 약 50분 걸린다. 그렇다고 굳이 코스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각 코스를 모두 걸어도 좋고, 일부 구간만 따로 걸어도 좋다.
◇마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느린꼬부랑길’
들머리는 슬로시티 방문자센터. 대흥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마을 첫걸음으로 가장 효과적인 공간이다. 어지간한 명소도 이곳을 시작으로 모두 돌아볼 수 있다. 1코스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배 맨 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은 느티나무다. 이 나무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나당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러 왔다가 배를 묶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어 봉수산자연휴양림을 지나 북쪽 애기폭포 방면으로 길은 이어진다. 백제 부흥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과 마을을 잇는 중간 지대로, 봉수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난다면 임존성까지 걸어와도 좋다. 이 길에서는 백제 부흥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휴양림 전망대에서는 대흥마을과 예당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길은 마을로 이어진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대흥동헌은 예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관아 건물이다. 동헌은 고을의 수령(지금의 군수)이 집무를 보던 곳. 1407년에 짓고 조선 중기에 보수했다. 현재 ‘임성아문’(任城衙門)의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과 동헌이 남아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내삼문 너머를 바라보면 나른한 햇살과 느긋한 봄바람이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준다. 동헌 뒤편으로 KBS 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 촬영장이 있다. 벚나무와 장독대 고택이 한데 어우러져 정겨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촬영장 뒤편으로는 흥선대원군 척화비와 조선 영조대왕의 11녀인 화령옹주의 태실이 있다. 화령옹주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의 조카며느리이기도 하다.
동헌을 나와 ‘이성만 형제 효제비’와 ‘의좋은 형제 동상’을 만난다. ‘의좋은 형제’는 밤새 상대의 창고로 볏단을 나르다가 우연히 만난 형제 이야기. 1497년 연산군 3년에 가방교 옆에 이성만 형제의 행실에 대해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173자를 기록한 효제를 세웠다. 1964년 예당저수지 완공 시 수몰되었다가 1978년 극심한 가뭄으로 예당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됐다.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으로 실화다.
2코스에서는 대흥면사무소 앞 달팽이미술관이 눈길을 끈다. 옛 대흥보건지소를 개조한 건물이다. 대흥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가 자주 열린다. 달팽이미술관을 지나서는 동서리천 물길과 봉수산 중턱 사색의 길을 걷는다. 3코스 사랑길은 사랑나무에서 교촌2리를 지나 원두막에 이르는 구간이 하이라이트다. 논두렁이나 샘터 등이 시골 정취를 전한다. 길은 예당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원두막에서 끝난다. 대흥마을에서 가장 낭만적인 풍광이다. 느린 풍경이 주는 삶의 쉼표같은 모습이다.
◇여행메모
△가는길=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서해안 고속도로나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갈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탄다면 당진IC에서 당진대전고속도로를 갈아타고 가다 예산수덕사IC에서 나와 21번 국도로 갈아타고 응봉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예당호 방면으로 직진, 교촌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해 직진하면 슬로시티 대흥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탄다면 천안IC에서 21번 국도를 타고 35㎞ 가면 예산이다.
△잠잘곳= 예산에는 숙박업소가 다른 지자체보다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곳이 덕산 스플라스 리솜이다. 또 부부나 연인, 친구와 함께라면 온천욕이 가능한 덕산스파뷰 온천도 좋다. 봉수산자연휴양림도 좋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격리시설로 지정되어 있어 사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