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킹맘]맞벌이와 함께 늘어나는 황혼육아…등골 휘는 '할마·할빠'

by송이라 기자
2018.12.31 06:14:00

맞벌이 열에 여섯은 조부모 육아지원…비자발적 양육 76%
직장·보육기관 돌봄공백 황혼육아가 메워…양육지원 無
''할마·할빠 양육수당 지급법'' 발의…부작용 지적도

일러스트=심재원(그림에다) 작가
[이데일리 송이라 기자] 직장인 황설희(가명·34)씨는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하기 전 친정엄마 옆으로 이사했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해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7시인 황씨에게 친정엄마의 도움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식사준비부터 아이 등·하원, 각종 집안일까지 엄마의 손길이 안닿는 곳이 없다. 요즘 들어 부쩍 늙으신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당장 도움이 필요할 땐 친정엄마부터 찾는다.

남순옥(가명·64)씨는 6년째 황혼육아 중이다. 딸이 직장에 나가면서 부탁해와 거절할 수 없어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체력이 달리는 게 느껴진다. 큰손주가 태어날 때만 해도 아이를 안고 씻기는 일이 대수롭지 않았는데 2년전 태어난 둘째손주까지 돌보려니 여기저기 안아픈 곳이 없다. 눈에 넣어도 안아플 정도로 이쁜 손주지만 내 몸 상해가면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할지 걱정이다.

맞벌이하는 자녀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황혼육아’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부모의 장시간 근로와 보육·교육기관간 돌봄공백을 황혼육아가 메우는 만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만 일각에서는 수당 등 황혼육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되레 황혼육아 문화를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보건복지부의 ‘2017 어린이집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집 등·하원 전후로 부모 이외 혈연관계 양육자가 있는 아동은 26%로 이중 96%가 조부모 양육자로 조사됐다.

2016년 육아정책연구소 조사에서도 맞벌이 가구의 조부모(및 기타 친인척 포함) 이용비율은 63.6%로 아이돌보미(5%)나 베이비시터(5.4%)보다 현저히 높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맞벌이 가구의 영아양육을 위한 조부모 양육지원 활성화 방안 연구’ 역시 0~2세 영아 양육을 위해 조부모(및 기타 친인척 포함)에게 육아 도움을 받는 비율은 2009년 26.1%, 2012년 37.8%, 2014년 53%로 꾸준히 증가했다.

정부가 시설 중심의 공공보육을 확대하고 아이돌보미와 같은 공식적인 개별양육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맞벌이 부부 증가와 그에 따른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등의 이유로 현실에서는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이 가장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가구주 연령이 30~30세 사이 맞벌이 가구는 2014년 42.1%에서 지난해 47.3%로 꾸준히 증가세다.

그러나 정작 조부모들의 속내는 현실과 달랐다. 손자녀를 돌보고 있는 조부모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손주 양육을 하기 된 동기가 본인의 자발적 의지가 아닌 자녀의 부탁에 의한 비(非)자발적이라고 답변한 비율이 76%를 차지했다.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에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주당 5.25일, 42.53시간으로 일반 근로자의 근로 시간과 맞먹었고 평균양육기간은 21개월로 황혼육아는 일단 시작하면 장기간 양육을 맡게 되는 특징을 보였다.

10명 중 6명(59.4%)은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답했고 ‘그만 돌봐도 된다면 그만 두겠느냐’는 물음에 73.8%가 ‘그렇다’고 답했다. 즉, 많은 조부모들이 자녀의 부탁으로 기꺼이 손주를 돌보지만 가능하다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뜻이다.



이처럼 황혼육아가 맞벌이 부부의 돌봄공백을 메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면서 일각에서는 정부가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양육수당 등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 지난달 27일 이용호 무소속 의원은 조부모가 교육 이수 등으로 자격을 갖춰 아이돌봄서비스 제공기관에 ‘손자녀돌보미’로 등록하면 아이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양육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는 내용의 ‘아이돌봄 지원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의원은 “할마(할머니+엄마), 할빠(할아버지+아빠)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조부모 도움을 받는데 ‘가족이니까 당연하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할마, 할빠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라며 “국가 관리가 이뤄질 경우 수당 지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조부모가 관련 교육을 받게 되는 만큼 육아방식을 두고 벌어지는 가정 내 갈등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해외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황혼육아를 다양한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 호주는 조부모가 전문대학에서 영유아 교육코스 3단계 이상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 손자녀의 주양육자로 활동하면 주당 최대 50시간까지 양육수당을 지급한다.

독일은 일하는 조부모를 위해 급하게 손주를 돌봐야할 사유가 생기면 최대 10일간의 유급휴가를 주고 영국도 자녀의 육아휴직제도를 조부모도 같이 쓸 수 있도록 3대를 잇는 가족 공동 육아휴직 지원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또한 조부모와 부모, 손자녀 가정의 동거 또는 근처에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3세대 동거를 위한 주택건설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상 황혼육아 지원방안은 담겨있지 않다. 일부 지자체에서만 자체적으로 수당을 지급하거나 조부모 교실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황혼육아 지원을 보편적인 보육정책으로 확대하는 건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삼식 한양대학교 고령사회연구원 원장은 “해외에서 조부모 양육에 수당을 지급하는 사례는 어린이집 등 보육기관을 이용하지 않는 가정에 한해서다”라며 “국내에서는 지금도 기관을 이용하지 않을 때 양육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부모에게 지급하고 있는데 조부모 양육수당을 또 지급하는 건 중복지원 논란이 있을 수 있고 도덕적 해이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윤진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도 “조부모의 영유아 손자녀 양육지원 정책은 오히려 조부모의 황혼육아를 가중시킬 수 있다는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며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을 장려하기 보다는 정책수요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부모가 아이돌보미와 조부모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혈연관계 특성상 부정수급이나 재정누수가 우려되는 만큼 자격제한을 둬야 한다”며 “한편 3세대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가족관계가 형성돼야 하는 만큼 양육기술을 가르쳐주는 교육프로그램 뿐 아니라 조부모의 정서적, 심리적 지지를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