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07.05.05 14:43:45
[조선일보 제공] 북쪽 해안에 광대한 가스전(田)을 품고 있는 세계 3위의 가스 보유국. 20만 명의 자국민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료이고, 의료보험도 시내전화도 공짜다.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아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다면 실업률이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국가. 이제 허리띠를 풀러도 좋을 것 같은 이 나라가 극단의 개혁 리더십으로 국가를 개조 중이다.
복지국가에서 글로벌시장경제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하는 중동에 독특한 공존의 공간을 만들어 비즈니스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역발상의 창의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두바이 바로 옆에서 또 다른 기적이 지금 진행 중이다.
■ ‘패러슈트 전략’…
“세계 최고 인력·제도를 심어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행동하라.”
카타르 개혁의 지휘자 하마드 국왕은 다급하게 국민들을 ‘변화의 모랫바람’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그의 12년 집권기간 중 카타르는 연평균 18.7% 성장했다. 그의 부친이 이끌던 카타르는 그전 12년간 평균 0.3% 성장에 머물렀을 뿐이다.
지난 성적을 돌아다보며 흐뭇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만도 한데, 그는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현실을 다그치고 있다. 계속 석유·가스에만 의존해선 살 수 없다는 미래에 대한 위기감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 끼인 카타르의 지정학적 운명에 그는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공 체험은 노하우로 숙성되고,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걸프 국가 중 드물게 알루미늄·비료·가스 등 중공업 기반을 닦은 하마드 국왕은 이제 금융·교육·과학기술 등 고부가산업으로 차원이 다른 변신을 시도 중이다.
선진국이 지배하는 분야에 후발국이 뛰어들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적시간에 비례하는 아날로그적 질서에 하마드 국왕은 디지털적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패러슈트(낙하산·parachute)전략’. 세계 최고의 인력과 제도를 이식시켜 경쟁시키는 것이다.
카타르 금융 구축의 총본산인 QFC(카타르금융센터). 이곳의 최고 수장은 뉴질랜드인(필립 도프 감독위원장)이다. 4명의 이사회 멤버는 각각 영국, 프랑스, 미국, 홍콩의 금융인 출신이다. 이자를 받는 것조차 꺼려하는 이슬람법이 금융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아예 영미식 금융법을 제정하고, 이를 판결하는 별도의 법정까지 만들었다.
금융법정의 판사 7명은 전원 영국, 인도, 호주, 스코틀랜드 등 해외파 출신이다. 2년 전 설립된 QFC 직원 70명 가운에 60%가 외국 금융인들이다.
하마드 국왕은 “무조건 최고의 인력을 데려와 쓰라”고 지시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 런던의 시티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런던, 뉴욕, 프랑크푸르트, 홍콩 등 일류 금융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 인재들의 경험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QFC 자체가 패러슈트가 되어 기존 질서에 내리 꽂히자 카타르의 경제 부처와 금융 관련 기관들은 이제 무대로 뛰어올라 개혁경쟁을 벌이고 있다. 필립 도프 QFC 감독위원장은 “하마드국왕 리더십의 특징은 모든 결정을 매우 신속하게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마드 국왕이 미래 카타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교육 분야에도 ‘패러슈트 전략’이 도입됐다. 코넬(의학)·카네기멜론(컴퓨터공학)·텍 사스A&M(공학)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대학 5개를 1997년부터 한꺼번에 유치했다. 이곳의 인재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일터에서 5~6분 거리에 최고의 주거시설을 제공하고, 자녀교육 환경도 갖췄다. QF(카타르 파운데이션)의 찰스 멘필드 이사는 “미국 대학을 유치한 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보수적인 카타르 국립대학들도 살아 남기 위해 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슬람과 서구의 가치가 공존하는 공간
하마드 국왕 리더십의 또 다른 축은 독특한 공간의 창조다. 뒤지는 분야에선 세계 최고의 인재와 제도를 이식하지만, 동·서양과 기독교·이슬람간 문명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지점에 세계 유일의 공존 공간을 열고 있다.
이슬람의 CNN인 알자지라방송이 도하에 베이스를 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자지라방송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부터 마무드 아흐메디자네드 이란 대통령까지 비판한다. “세계 어느 국가의 지도자라도 잘못이 있으면 즉각 도발적인(provocative) 보도를 한다”는 게 알자지라의 원칙이다. 나와프 빈자심 QNH(카타르호텔협회) 회장은 “자유언론 없이는 사회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투명하지 않다면 결코 초일류 금융기관들이 북적대는 금융시장을 형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걸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함대가 정박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인 하마스를 포용하고, 이스라엘 무역대표부가 들어와 있는 곳이 카타르다. 이런 카타르를 두고 “모든 사람의 친구이며,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everybody’s friend, nobody’s friend)”라고 세계는 부른다.
카타르의 독특한 위상 설정은 ‘국제 콘퍼런스’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취재팀이 방문한 지난 4월 마지막 주 도하에선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토론’ ‘장애아동 인권포럼’ ‘세계 교육포럼’ 등 3개 국제 콘퍼런스가 한꺼번에 열렸다. 4월 한달 동안 12개, 1년에 평균 84개의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이 카타르다. 탁신 전(前) 태국 총리는 이중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토론’에 초대돼 민주와 자유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다. 모든 껄끄러운 목소리가 함께 울리고 있는 도하식 ‘멜팅폿(melting pot)’의 현장이다.
역사는 1세기 중반 카타르의 조상들을 보고 “끊임없이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했다. 기름과 가스를 찾은 21세기 카타르인들은 이제 미래의 물을 찾아서 골몰하고 있다. 그 선두에서 하마드 국왕이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