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異야기]①"인천 넘어 한반도 발전의 가교 이룰 것" 김수홍 인천대교 대표
by박경훈 기자
2017.09.12 05:55:00
인천대교, 한국에서 가장 긴 다리이자 '세계 3대 다리'
김 대표, 학창시절부터 사업…인조대리석 수입업으로 성공
IMF 외환위기 시기, 캐나다 넘어가 '인천대교' 제안
'지역사회 환원', '북한과 연결' 등 미래 준비할 것
| 김수홍 인천대교 대표는 “한국 건설사가 해외에 나가면 ‘하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면서 “이보다 상위 단계인 PM(프로젝트 관리)이 활성화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인천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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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데일리 박경훈 기자] “‘다리’ 라는 게 지어놓고 징수만 한다면 남하고 똑같은 거죠.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7일 인천 영종도에 자리 잡은 인천대교(주) 본사에서 만난 김수홍(58) 대표는 인천대교 개통 8주년을 앞두고 다음 10년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프로젝트 금융조달 완료가 끝이라 생각하는 건 금융 마인드, 준공이면 끝이라 생각하는 것은 건설사 마인드”라며 “통행료 무료화, 북한 프로젝트, 교량의 인공지능(AI)화, 사회봉사 등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9년 10월 19일 개통한 인천대교는 송도국제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를 잇는 민자고속도로로 총연장 21.38㎞에 교량 구간 18.35㎞에 달하는 한국에서 가장 긴 다리다. ‘가장 아름다운 세계 3대 다리’, ‘세계 5대 사장교’(斜張橋·Cable-Stayed Bridge), 영국 금융전문지 유로머니(Euromoney)가 선정한 ‘2005년 PF최우수상’, 2015년 국제프로젝트경영협회(IPMA) 세계 최우수프로젝트상 선정 등 수많은 상과 수식어가 인천대교의 우수성을 빛내주고 있다.
김 대표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학창시절 사업에 뛰어들고, 미국 이민 시절에는 좌절을 맛봤다. 귀국해 사업에도 성공했지만 이내 IMF 외환위기로 궁지에 몰렸다. 애국심 하나로 캐나다에서 인천대교를 기획했다.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아 직접 총대를 매고 대공사를 실현해냈다. 그 역시 “제가 지금 이 자리, 이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밝혔다.
김 대표의 집안은 300여년 간 조상 대대로 영종도에서 터전을 잡았다. 그는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정미업’(精米業)으로 적잖은 돈을 벌었다”며 “인천-영종도 여객선 노선을 처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를 역임한 고(故)김종식씨다.김 대표는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책을 읽는 거보다는 태권도, 복싱, 유도 등 운동하는 게 즐거웠고 대학에도 큰 뜻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성향 덕에 동대부고 재학시절에는 아예 고교생 신분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시장’(市場)을 알고 싶다는 취지에서였다. 김 대표는 10대에 서울 시내 호텔, 미8군, KBS 방송국 등에 부식납품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는 “지금의 케이터링(Catering) 체제를 당시에 도입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세가 기울고 작은 누나의 병세로 인해 그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여느 미국 이민자와 같이 그의 가족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사진 전공으로 입학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미국 생활을 하며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는 “집안 형편은 안 좋은데 실력이 부족해 장학금을 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공부를 따라갈 수 없었다”며 “현실과 이상의 간극으로 세상에 안 좋은 면만 봤다”고 돌이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 인명 사고까지 났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큰 충격에 빠졌다. 김 대표는 그렇게 휴학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건진다. 반려자를 만나면서다. 김 대표는 “‘사랑을 받으니 사랑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서히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에서 인조대리석 수입 판매 사업을 벌였다. 1990년대 초반 연 매출 100억원을 올릴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사업은 IMF 외환위기 시기 환율이 2배로 껑충 뛰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다. 돈 문제를 해결한 후 사업을 처남에 맡기고 그는 캐나다행을 택했다. 국난에 빠진 모국의 외자유치를 위해서다. 그는 한국 사업 시절 알고 지냈던 캐나다 가구 기업 ‘테크니온’(Teknion)의 도움을 받아 엔지니어링 업체 ‘아그라’(AGRA) 직원을 만난다. 김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인천대교를 처음 제안하게 된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캐나다를 방문하며 상황은 급진전한다.
양국 정부 간에도 이야기됐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은 경제난을 겪고 있어 중앙정부나 인천시 모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도중 아그라는 영국계 에너지 회사인 ‘에이멕’(AMEC)에 인수된다. 인천대교 건설은 흐지부지 될 공산이 커졌다. 김 대표는 직접 영국을 찾아가 “이번 사업을 실행하면 한국과 에너지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에이멕을 설득해 이를 성사시킨다.
에이멕은 1999년 인천대교(주) 법인을 설립했고 투자자를 모집해 2005년 착공에 들어갔다. 김 대표는 이 시기 대표이사에 취임한다. 그는 인천대교를 건설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차이점으로 시행과 시공의 분리를 들었다. 김 대표는 “당시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진행됐던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은 시행사와 시공사의 구분이 없었다”면서 “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에 더불어 사업비는 늘어나기 십상이고 단기적인 시공 이익에만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건설에서 신공법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도 했다. 공사비를 고정금액으로 묶은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건설사가 신공법을 이용해 비용을 줄이면 남는 금액을 건설사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건설사 스스로 창의적으로 사업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여기에 인천대교 건설에는 국내 민자사업 사상 처음으로 경쟁 입찰을 도입했다. 김 대표는 “이를 통해 사업비를 줄이는 동시에 통행료 인하로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민자사업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MRG(최소수입보장)도 2016년부터 받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그의 꿈은 인천대교가 고향의 발전에 가교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 김 대표는 “협약기간 만료 이후 영종 통행료를 없애는 대신 높아진 영종도의 자산가치를 기반으로 다양한 수익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영종도의 대규모 부지를 사업시행자와 정부부처 등이 공동으로 개발·관리하되 제가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이럴 경우 상승하는 부동산의 자산가치를 어떻게 국민에게 공익 목적으로 되돌려 주느냐와 발생하는 수익을 어떻게 재투자할 것인가가 투기가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개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통일을 위한 준비로 이곳에서 북한 개풍까지 다리를 연결하고 싶다”고 전했다. 인천공항을 북한과 연결하면 관광 사업 진흥은 물론 통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그의 구상이다.
1959년 인천 영종도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수송초, 동대부고 등을 나왔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해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들어갔지만 휴학한다. 귀국해 인조대리석 사업으로 성공한다. 영국 에너지 회사인 에이멕 한국지사 대표를 역임하고 2005년 인천대교 대표에 올랐다. 경남대에서 경영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석좌교수를 겸임 하고 있다. 우간다 이주노동자를 도와준 인연으로 주한 우간다 명예영사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