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따다]조직내 투명인간..나는 이렇게 왕따가 됐다

by유재희 기자
2013.10.31 07:30:00

[이데일리 유재희 유선준 기자] . 2013년 3월 11일.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다. 새로 온 부장은 이유 없이 내게 소리 지르고 창피를 준다. 후배들 앞에서 “왜 그리 답답하게 일을 하느냐. 후배들 보기 창피한 줄 알라”며 면박을 주는 것은 예삿일이다. 이번 승진 대상에서도 나를 제외시켰다. 부장 때문인지 동료들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나에 대해 근거 없는 모함과 험담도 일삼는다. 출근만 하면 괜히 주눅이 들면서도 억울함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다.

일하기 위해 모인 회사에도 집단 따돌림(왕따)은 존재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최근 국내 직장인 2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명 중 9명(86.6%)은 따돌림을 한 번 이상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4.1%는 지속적인 따돌림을 당했다.

왕따를 당하게 되면 △이직 고민 △자신감 상실 △업무 능률 저하 △불면·우울증 등 질병 발생 △성격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는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직장 내 왕따가 보복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지난 4월 경남 창원의 한 제강공장에서는 “왜 평소 왕따를 시키느냐”며 직장 동료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 2013년 6월 2일.
드디어 이직했다. 직장 동료들이 나의 입사를 환영하며 따뜻하게 맞이해줬다. 푸근한 인상의 팀장은 “일이 많은 곳이라 힘들기는 하지만 훌륭한 동료들이 많은 만큼 일할 맛이 날 것”이라고 했다. 후배들 또한 외부에서 경력으로 들어온 내게 “능력 있는 선배에게 많이 배우겠다”며 반가워한다. 인간 말종들만 모여 있던 전 회사와는 다른 직장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직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2013년 7월 4일.
이놈의 회사는 일이 많은 것도 괴로운데 회식을 너무 자주 한다. 회식 자리에선 부서원들의 가정사에서부터 연애사까지 무수한 얘기가 쏟아진다.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남 얘기를 몇 시간 동안 듣고 있자면 짜증이 난다. 내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부장이 “오늘은 1차에서 마무리하자”며 자리를 정리한다. 그래 봤자 이미 저녁 9시다. 앞으로는 회식에서 빠져야겠다.

. 2013년 7월 26일.
오랜만에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오늘은 일도 많지 않다. 오후 5시. 부장이 부르더니 업무를 지시한다. 이 일을 맡았다가는 6시 퇴근은 커녕 야근을 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살펴보니 내 업무영역도 아니다. 정중하게 “이 업무는 제가 할 일이 아닌데다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 힘들겠다”고 말씀드렸다. 팀장이 대신 일을 맡았다. 마음이 불편하긴 하지만, 약속을 취소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 2013년 8월 8일.
다음 주부터 여름 휴가다. 사규 상 하계 휴가는 닷새지만 바로 이어지는 광복절 덕분에 쉬는 날이 열흘이나 된다. 오랫동안 별렀던 유럽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상사에게 휴가 결재를 받고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팀장이 불편한 표정으로 짜증을 낸다. 팀장이 휴가를 가면 나도 똑같이 할 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취업포털사이트 사람인이 최근 직장인 974명을 대상으로 ‘왕따 당하는 유형’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1위는 △눈치 없고 답답한 성격을 가진 사람(34.4%, 복수응답)이 차지했다. 이어 △말로만 일하는 사람(30.8%) △업무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30.1%) △조직에 어울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24.6%) △조직(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22.1%) △잘난 척이 심한 사람(21%) △동료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사람(20.3%)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 2013년 8월 9일.
점심시간이다. 늘 같이 식사하던 팀장과 후배가 오늘 약속이 있다며 먼저 나간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너무 급히 먹었는지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 문밖으로 얘기 소리가 들린다. 팀장과 후배다. “요즘같이 바쁠 때 자기 혼자 휴가를 가면 어쩌냐. 게다가 남들은 주말 껴서 4~5일 겨우 쉬는데 10일이 말이 되냐. 너무 이기적이다”라고 팀장이 말문을 연다. 후배는 “남들은 좋아서 야근하고, 꼬박꼬박 회식 참석하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리는 것 같다”고 거든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이 떨린다.

직장인들은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왕따를 당한다고 느낄까. 사람인이 직장인 30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나 몰래 대화를 나눌 때(57.2%, 복수응답)를 가장 많이 선택했다. 뒤이어 △나에 대한 뒷담화를 들었을 때(53.1%) △회식 등 내부 모임 소식을 혼자 모를 때(34.7%) △인사를 자주 무시당할 때(25.6%) △심부름 등 잡무가 주로 나에게 주어질 때(20.8%) 등의 답변이 나왔다.

. 2013년 9월 10일.
팀장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팀장은 걸핏하면 잔소리를 쏟아내고, 간혹 실수라도 하면 험한 말을 내뱉는다. 화장실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나도, 감정이 격앙돼 서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은 부서 회식이 있는 날이다. 한동안 약속이 겹쳐 계속 빠졌던 터라 이번엔 꼭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에 보고서 작성을 서둘렀다. 그런데 생각보다 마무리 작업에 오래 걸린다. 엑셀 다루는데 능숙한 후배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자기 일도 바쁘다며 짜증을 낸다. 퇴근 시간이 되자 부서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회식 장소로 향한다. 홀로 사무실에서 보고서 마무리하는데 울화가 치민다. 이 사람들도 전 직장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모두 인간 말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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