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알렸던 그들…서울서 만나는 백남준·곽훈·김인겸
by이윤정 기자
2024.04.30 05:30:00
''30 Years: Passages-백남준, 곽훈, 김인겸'' 전
백남준 ''비밀 해제된 가족 사진 1984'' 전시
곽훈 최근작 ''포크레인 드로잉'' 선보여
김인겸 설치 작업, 영상으로 만나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열렸던 1995년 제46회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는 한국 미술계에 매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1986년 처음으로 참여한 이래 10년간 외딴 건물에 더부살이를 해오다가 처음으로 독립 국가관인 ‘한국관’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한국관 첫 전시를 꾸린 이들은 곽훈(83), 김인겸(1945~2018), 윤형근(1928~2007), 전수천(1947~2018) 작가였다. 곽훈 작가는 4인방 중 현재로서는 유일한 생존작가다. 당시 야외 설치 퍼포먼스 ‘겁/소리, 마르코 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들’을 선보였던 곽 작가는 올해 열린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에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선보이며 그때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곽훈 작가는 “갑자기 내가 살아있는 골동품이 됐다”며 “30년 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도 낯설었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30년 후에 한국 미술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하고 재평가를 받는 기분이라 정말 행복하다”고 벅찬 소감을 전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의 닻을 올렸던 이들의 궤적을 되짚어 보는 의미있는 전시가 열린다. 오는 5월 2일부터 6월 8일까지 서울 강남구 예화랑에서 열리는 ‘30년 여정(30 Years: Passages)-백남준, 곽훈, 김인겸’ 전이다. 한국관 건립에 적잖은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백남준(1993년 독일관 대표작가로 선정돼 황금사자상 수상)과 곽훈, 김인겸을 재소환해 30년 전의 그들과 오늘을 관통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1회 전시는 작가들에게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라 생소한 것이었다”며 “한국의 현대미술을 세계에 각인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던 이들의 책임감과 열정을 전하고 싶어 전시를 준비하게 됐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 백남준 ‘비밀 해제된 가족 사진 1984’(사진=예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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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3층부터 1층까지 각 작가의 작품들로 꾸몄다. 3층 전시장에서는 백남준의 텍스트와 드로잉 아카이브, 사진, 판화 자료들을 선보인다. 그는 1960년대부터 TV, 비디오, 위성 등 당대 하이테크 기술과 기기를 작품의 매체로 이용해 예술작품으로 선보여왔다. 한국 미술계가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그가 남긴 텍스트, 드로잉 등을 통해 특유의 사유 방식과 소위 예술 외교가로서의 활약상을 살펴본다.
전시장 중앙에 있는 ‘비밀 해제된 가족사진 1984’는 갓을 쓴 여성 등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전복시켜 놓은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그의 가족 가운데 여성들끼리 모여 찍은 단체 사진인데, 사진에서 남자로 보이는 가족들은 모두 여자가 남성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해당 아이디어는 백 작가의 어머니가 냈다고 알려졌다. 1963년 파르나스 갤러리 전시의 전단지도 볼 수 있다. 경향신문의 일부가 전단지 배경으로 사용된 것이 눈에 띈다. 전시해설을 맡은 김인겸 작가의 딸이자 미술비평가인 김재도 큐레이터는 “이 당시만 해도 한국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백남준 선생은 경향신문의 텍스트를 통해 고국의 언어와 자신의 세계를 융합해서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
| 곽훈 ‘퍼포먼스를 위한 드로잉(Drawing for performance)’(사진=예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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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장은 곽훈의 작품으로 꾸며진다.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과 한국으로 오가며 활동해 온 곽훈은 이번 전시에서 ‘찻잔’ ‘주문’ ‘겁’ ‘기’ 시리즈들에 이은 최근작 ‘할라잇’ 시리즈까지 선보인다. 야외 퍼포먼스 작업 ‘포크레인 드로잉’도 전시해 놓았다. 올 하반기에 곽 작가가 직접 포크레인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인데, 이 작업을 그림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다.
30년 전 선보였던 ‘겁/소리, 마르코 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들’은 한국 가마에서 구운 옹기 주변으로 20명의 비구니, 김영동의 대금연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퍼포먼스였다. ‘겁(Kalpa)’은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를 지칭한다. 옹기, 대금 소리, 비구니들의 신체가 서로를 잇는 길이 되어 대지를 넘어 하늘, 관람자의 머릿속까지 울려 퍼졌다. 당시 이 신선한 동양의 퍼포먼스는 현지 매체에서 한국관을 소개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층 전시장은 1996년 파리 퐁피두센터의 초대로 프랑스로 건너가 200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면서 활동한 김인겸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김인겸은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첫 전시에 ‘프로젝트21-내추럴 넷’(Project21-Natural Net)을 출품했다. 아크릴 구조물, 물을 넣은 수조, 비디오 모니터, CCTV 등 인공적 구조물과 자연물, 테크놀로지 기기가 만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설치 작업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당시 촬영한 영상과 아카이브 자료를 만나볼 수 있다. 2010년대 중반 스퀴즈(나무나 플라스틱 손잡이 사이에 고무를 끼워 물감이나 색소를 고르게 펴주는 도구)를 이용한 특유의 페인팅 작업 ‘스페이스리스’(Space-Less), 면을 통해 입체를 구현한 조각 ‘빈 공간’ 등도 보여준다. 김 큐레이터는 “김인겸의 작업은 공간, 사유, 정신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다”며 “한국의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세 명의 작가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어서 영광이다. 아버지의 작품을 비롯해 이들의 작품들이 사장되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