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② 지역마다 다르다…한반도 3대 냉면 ‘평양·함흥·진주'

by강경록 기자
2018.04.13 05:58:00

''3대 냉면''을 아십니까
평양냉면, 가게마다 육수비법 달라
함흥냉면, 전쟁 피난길 따라 발전
진주냉면, 화재로 맥 끊겼다 부활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냉면. 왼쪽부터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한국인의 냉면 사랑은 유별나다. 최근에는 ‘평뽕’(평양냉면의 중독성을 빗댄 표현)‘이니, ’평부심‘(평양냉면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등 각종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그만큼 냉면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사랑받아왔다. 대표적인 냉면광(狂)으로는 구한말 고종과 순종, 백범 김구 등을 꼽는다. 한국전쟁은 냉면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었다. 이북 피란민이 향수를 달래는 음식에서 일반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더 나아가 중독 현상까지 일으키면서 어느듯 한국인 대다수가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기호나 지역에 따라 냉면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진주냉면이다. 앞의 둘은 이북 출신이고, 진주냉면은 유일한 남한 출신이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3대 냉면으로 부른다.

◇담백함과 심심함 사이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평안도 지방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추운 겨울, 따뜻한 온돌 아래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데서 유래했다. 맵지 않고 담백한 맛이 자랑이다.

평양냉면은 조선 중기 이후 널리 서민에 보급됐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흥로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을 꼽았다. 감흥로는 계피와 생강을 꿀에 버무려 조수를 붓고 밀봉해 담그는 술이다. 40도가 넘는 독주로 평양에서 담근 것이 유명했다. 평양에서는 고기안주로 감흥로를 마신 후 취하면 냉면을 먹고 속을 풀었다고 해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지금도 술자리가 끝날 때 마지막으로 국수를 먹는 경우가 있는데, 평양에서 냉면이 해장국 역할을 한 풍속에서 비롯한 것이다.

평양냉면의 면은 전분이 아니라 메밀로 뽑았다. 그래서 면이 거칠고 굵다. 여기에 끊기도 별로 없다. 그래서 밀가루나 전분을 섞어 뜨거운 물에 익반죽해서 치대야 한다. 메밀과 밀가루 혹은 전분과의 비율, 반죽하는 기술에 따라 면의 끈기와 질감이 달라진다.

면도 면이지만, 육수가 가장 중요하다. 육수 맛이 면의 맛까지도 좌우해서다. 육수는 꿩 삶은 국물을 으뜸으로 친다. 사골을 우린 육수나 동치미 국물로 꿩 육수를 대신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소나 돼지, 닭 육수를 사용한다. 이름난 평양냉면집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육수비법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고명은 삶은 고기와 달걀지단, 배, 시파, 실고추 등 다양하게 쓴다. 겨자와 식초도 빠질수 없는 감초다. 겨자는 국물에, 식초는 면에 뿌려 먹는다.

서울 장안엔 ‘평양냉면 4대 천왕’이 있다. 을지로4가의 우래옥(02-2265-0151),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02-2266-7052), 충무로의 필동면옥(02-2266-2611), 장충동의 평양면옥(02-2267-7784)이다.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은 한 집안 사이다. 4대 천왕은 거의 한동네에 모여 있다. 동대문시장 일대 상인 중에 실향민이 많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닭무침으로 이름난 남대문시장의 부원면옥(02-753-7728)도 비슷하다.

지난해 여름 서울 마포구의 한 냉면집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사진=이데일리 DB).


◇함흥에는 없는 ‘함흥냉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차이를 아는가. 많은 사람들은 둘의 차이를 육수에 말아먹는 것을 평양냉면, 양념에 비벼 먹는 것을 함흥냉면으로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 이런 식의 구분은 분단 이후 남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사실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에 있다. 평양식은 메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으로 면을 만든다.

함흥냉면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함흥냉면은 일제강점기 때 함경도 사람들이 즐기던 농마국수에서 유래했다. 농마는 녹말의 북한 사투리다. 녹말의 재료는 감자로, 함경도를 대표하는 식재료였다. 함경도는 감자를 재배하기에 생육환경이 적합했고, 크기나 품질도 매우 좋았다. 일제는 이런 함경도의 이점을 살려 개마고원 근처에 대규모 감자농장을 조성했고, 여기서 생산한 감자를 흥남, 함흥, 원산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도 감자를 값싸게 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함흥냉면은 매우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냉면 등 북한 음식의 전파 경로를 따지면 실향민들의 피란길이 보인다. 함경도 사람들은 1·4후퇴 때 흥남 부두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고향으로 어서 돌아갈 생각에 속초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고향길은 막혔고, 생계를 위해 속초에서 흔하던 명태 등 해산물이나 건어물을 서울에서 팔려고 중부시장 근처의 오장동에 모였다. 중부시장은 우리나라 최대의 건어물 시장으로, 억척스러운 함경도 상인들이 탄탄한 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이곳에서 함경도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은 함흥냉면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고향의 중독성 강한 매운맛과 새콤한 회무침의 맛을 잊기 어려워 고향 사람들끼리 즐기다가 상업화에 성공했다.

피란민이 많이 살았던 서울 중구 오장동이 함흥냉면의 ‘성지’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1953년 이곳에 자리 잡은 ‘흥남집’이 대표 식당이다. 고구마 전분에 매운 홍어회 또는 간자미회를 쓴다. 비빔냉면은 매운 양념을 비벼서 내오나, 회냉면은 면에 양념하지 않고 매운 양념과 참기름, 설탕 등을 취향대로 더해 먹는다.

◇평양냉면과 견주다 ‘진주냉면’

“랭면 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주는 것이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이었다.”

1994년 발간한 ‘조선의 민속전통’이란 북한과학백과사전 일부 내용이다. 메밀가루로 면을 만드는 것도 평양냉면과 비슷하다. 진주냉면의 특징은 육수와 고명에 있다. 남해와 바싹 닿는 진주의 냉면은 마른 명태머리, 건새우, 건홍합 등의 해물을 육수에 더했다. 그 위에 잘게 자른 쇠고기전을 필두로 실고추, 계란 지단과 오이 등을 고명으로 올린다. 원래는 전복과 해삼까지 더해지는 음식이었으나 서민음식으로 사랑받으면서 고명도 소박해졌단다. 또 벌겋게 달군 무쇠 막대를 끓는 육수에 반복해서 담가 비린 맛을 제거한 후 15일간 저온숙성 시켜 깊은 맛을 낸다. 이 중에서 육전이 진주냉면만의 특징이다. 달걀옷을 입혀 부친 육전의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시원한 해물육수와 어우러져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비빔냉면에서는 매운맛을 중화시켜 고소한 맛을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로 육전을 한 접시 주문해 같이 먹으면 진주냉면 맛을 두 배로 즐길 수 있다.

진주냉면의 유래는 이렇다. 1800년 말, 진주목에서 나온 숙수(조리사) 한명이 옥봉동 개울가에서 만들어 팔던 것이 시초라고 한다. 진주냉면은 권번가에서, 야식으로 즐겨 먹던 고급요리였다. 권번가는 일제강점기 때 기생을 관장하는 조합이 권번이다. 이 권번이 진주에 있었다. 당시 옥봉동은 기생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기생들은 야심한 밤에 냉면집을 찾아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고 한다.

19960년대 중반까지 옥봉동을 중심으로 냉면집은 성행했다. 한집에 배달부만 서너 명씩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1966년, 진주시내 중앙공설시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며 냉면 가게도 모두 불타 진주냉면의 맥이 끊어졌다. 그러다 199년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씨에 의해 진주냉면은 되살아났다. 김 씨는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의 민속전통’에서 ‘냉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진주냉면을 찾아 나섰다. 김영복 씨는 과거 진주냉면 가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 각자 진주냉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후 공통점을 정리해 사라진 진주냉면을 재현해 냈다. 현재 이 재현한 진주냉면을 맛볼 수 있는 곳 중 한 곳이 ‘하연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