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구주택 ‘깜깜이’ 보증금..‘깡통전세’ 떠안는 세입자 속출 우려

by권소현 기자
2018.04.05 05:30:00

다가구주택 전세의 함정
18억 건물에 3000만원 세 들었지만
대출 5억원에 다른 보증금 14억원
한푼 못 건지고 쫓겨나는 세입자도 있어
확인서 써줘야 보증보험 드는데..집주인 동의 꺼려
"다른 세입자 보증금 확인할 수 있는 장치 마련해야"

[그래픽=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작년 말부터 경기도 화성시 마도 산업단지 인근에 있는 다가구주택에 보증금 3000만원, 월세 10만원에 살고 있는 황모(42)씨는 얼마 전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집주인이 전셋집을 담보로 5억1000만원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건물(다가구주택) 시세가 최소 18억원에 달해 만일 집주인이 대출을 못 갚아 집이 경매로 넘겨지더라도 전세보증금(이하 전세금)은 건질 수 있을 것이란 공인중개사의 말만 믿고 계약한 게 화근이었다. 같은 다가구주택 내 다른 집 세입자들의 전세금 규모를 아예 감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씨보다 먼저 전세계약을 맺은 다른 세대는 13가구로 전세금이 총 14억원 정도였다. 이 집 경매 감정가가 12억7000만원으로 이 가격에 낙찰이 되더라도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준 새마을금고가 이자를 포함해 6억6000만원 정도를 가져가고 황씨보다 먼저 들어온 세입자들이 전세금을 받아가면 그는 전세금을 한푼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다. 황씨는 다른 세입자의 전세금도 해당 다가구에 걸려 있는 채권인 만큼 등기부등본이나 별도 서류에 기재돼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서민들의 주요 주거지 중 하나인 다가구주택이 전세 세입자 불안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 집을 담보로 받은 대출금 뿐 아니라 같은 주택에 사는 다른 가구의 전세금도 모두 채무이기 때문이다. 특히 집값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운 역전세난이 발생한 일부 수도권과 지방에서의 불안이 더 심하다. 다가구주택 주인이 대출을 못 갚거나 전세 만기가 된 다른 가구가 역전세난으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경매 신청을 하면 대출금 뿐 아니라 먼저 전입한 가구의 보증금까지 다 내주고 남아야 전세금을 받을 수 있어 가장 최근에 전세계약을 맺은 세입자는 자칫 전세금을 날리는 경우도 생긴다.

전세금 보호장치인 전세보증보험도 사실상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입하기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다가구주택 임대차 계약에서 중요한 정보인 해당 주택의 전체 전세금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가구주택은 여러 가구가 살 수 있도록 지어진 주택으로 건축법상으로 단독주택에 해당한다. 주인이 여러 명인 빌라(연립·다세대주택)와 달리 집주인 한 명이 소유한 주택인 것이다. 역전세난 시기에 다가구주택 전세가 위험한 것은 바로 이같은 구조 때문이다. 구분등기가 돼 있지 않고 주택 한 채에 여러 가구가 거주하는 형태여서 집주인이 담보대출을 받으면서 설정한 근저당뿐 아니라 먼저 전세계약을 맺고 들어온 다른 가구의 전세금까지 해당 주택에 걸려있는 채무로 잡힌다. 만일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경우 금융권 대출금과 먼저 전입한 가구의 전세금을 빼고 나머지 범위 안에서 회수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른 가구의 전세금은 다가구주택 세입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정보다.

하지만 다가구주택 전세계약을 맺을 때 다른 가구의 전세금까지 확인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이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크지 않은 탓이다. 공인중개사법상 전세계약 중개시 임차인에게 다른 가구의 전세금을 고지하고 안내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임차인이 묻기 전에 먼저 안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인중개사도 집주인에게 물어 확인하는 것 외에 뚜렷한 방법이 없다.

다가구주택에 전세 사는 조모씨는 “2년 전 전세계약 때 공인중개사가 등기부등본을 떼어서 근저당 규모만 확인해줬지 다른 가구의 전세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며 “전세금이 주택 시가의 절반을 훌쩍 넘는데도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픽=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다가구주택은 전세금 관련 보험에 가입할 때에도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 비해 까다롭다. 선순위채권이 집값의 80%를 넘어서면 안되고 여기에 가입하려는 전세금을 합한 가격이 집값을 초과할 경우 가입할 수 없다. 집값은 보통 공시가격의 1.5배나 공인중개사가 확인해준 시세를 활용한다. 그나마 단독·다가구주택의 가격 대비 선순위채권 비율 한도가 60%였는데 그나마 올해 2월부터 80%로 확대되면서 문턱이 낮아지긴 했다.

문제는 다른 세대의 전세금을 확인할 수 있는 임대차사실확인서를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집주인이나 공인중개사가 확인서를 써줘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일부 집주인은 혹시라도 이자를 물어야 할 상황이 생길까봐 탐탁찮게 생각한다. 세입자가 전세계약이 끝나 보험을 통해 전세금을 돌려받고 나가면 이후 세입자를 구해 전세금을 상환할 때까지 집주인이 전세보증보험 기관에 이자를 내야 해서다.

그나마 새로 전세계약을 하는 경우에는 공인중개사에게 선순위 전세금 확인을 요구할 수 있고 불가능하다면 전세계약을 안 하면 그만이지만, 계약 연장일 경우엔 다른 방법이 없다. 전세계약을 갱신하면서 전세금을 올릴 경우 차액뿐 아니라 전체 금액이 후순위로 밀린다.

다가구주택이 주로 서민들이 거주하는 주택 유형인 만큼 전세금 보호장치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소득 1~4분위 저소득층의 53.1%가 다가구주택이 포함된 단독주택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파트 거주비중 28.7%에 비해 두 배가량 높았다. 9~10분위 고소득층에서는 14.7%만이 단독주택에서 살았고 74.5%가 아파트에 거주했다. 또 전세값 하락기에는 다가구주택 전세수요가 떨어져 기존 세입자의 발이 묶일 가능성이 아파트 등에 비해 더 높다.

이에 따라 집주인 확인 없이도 근저당이나 전입세대 정보처럼 선순위 보증금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전문위원은 “다가구주택 세입자들이 필요시 다른 세데의 전세금 규모를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개인정보 노출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