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 향으로 그려본 '한반도 초상'…'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서 만난다
by이윤정 기자
2024.02.27 05:30:00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전시계획 발표
구정아 작가, 한국 대표향 17가지 선보여
전 세계 600여개 사연에서 키워드 추출
"개개인의 기억 나누며 인류 아우르는 프로젝트"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바다의 향기,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느껴지는 산내음, 할머니가 밥을 짓던 구수한 냄새, 도로 위 자동차의 배기가스 냄새까지.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도 그 순간에 느꼈던 향이나 냄새가 추억을 소환할 때가 있다. 주로 어린시절 느꼈던 냄새와 어른이 되어서 기억하는 특정 공간의 냄새는 서로 다른 기억을 끄집어낸다. 보이지 않는 ‘냄새’가 곧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온 삶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향을 주제로 다양한 공간, 경험을 발전시켜온 구정아(57) 작가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한인과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 등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한국의 도시나 고향의 냄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렇게 수집한 600여개의 사연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향 17가지를 만들어냈다.
오는 4월 시작되는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가 베일을 벗었다. 2년마다 열리는 ‘베네치아비엔날레’(미술전·건축전 격년 개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행사다. 그중 나라별 ‘국가관’은 각국 미술의 현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시관이다.
이번 한국관의 전시 주제는 ‘보이지 않는 냄새와 향’이다. 전 세계 관람객들의 이목이 쏠리는 시각 전시에서 보이지 않는 냄새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새롭다. 파브리시우스 예술감독은 “향은 주변을 감싸고 있어 숨을 들이켤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강력한 표현”이라며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향을 매개로 한국의 초상화를 그리고, 개개인의 기억을 나눔으로써 다양한 인류를 아우르는 프로젝트를 선보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 지난 ‘베네치아엔날레’ 한국관 전경(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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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라마’는 향을 뜻하는 영어 단어 ‘odor’에 드라마의 ‘rama’를 결합한 말이다. 새롭게 조향해 낸 17가지 향으로 한반도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골자다. 4월 17일 한국관 공식 개막식과 함께 문을 열어 약 7개월간 전 세계 관람객들을 만난다.
구 작가는 ‘냄새 경험’ 설치 작품으로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1996년 프랑스 파리 스튜디오의 작은 옷장에 좀약을 배치한 냄새 설치작품 ‘스웨터의 옷장’을 선보였고, 파리 퐁피두센터 등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한국관은 후각과 시각을 총동원해 한국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진다. 전시장 바닥에는 향을 퍼뜨리는 디퓨저 역할을 하는 조각 ‘우스(OUSSS)’가 설치된다. 또한 바닥에 새긴 무한대 기호, 뫼비우스 띠 형태의 대형 나무조각, 월페인팅 등을 통해 한국의 향과 냄새를 ‘시각적 상상’으로 변환해 선보인다. 구 작가는 “한국의 자화상을 다루면서 한반도에만 경계를 제한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좀 더 폭넓은 사람들의 기억을 소환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주제인 ‘이방인은 어디에나(Foreigners Everywhere)’와도 맞닿아 있다.
| 서울 종로구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베네치아비엔날레 ‘제60회 국제미술전’ 한국관 전시 기자간담회에 구정아 작가(오른쪽부터), 예술감독인 이설희, 야콥 파브리시우스가 참석했다(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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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위해 구 작가는 지난해 6월 25일부터 9월 30일까지 공모를 통해 향과 냄새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했다. 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추출한 20개의 키워드로 한국관에 설치할 향 17개를 만들었다. 조향은 향수 브랜드 ‘논픽션’과 협업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향기의 기억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정 시기에 특정 키워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산업이 많이 발전하지 않았던 1960년대에는 주로 ‘자연’을 기억하는 키워드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기억을 소환한 사람들은 ‘산의 향기’ ‘비에 젖은 흙내음’ 등을 기억 속 향기로 적었다. 산업화가 가속화된 1970~80년대는 오염된 공기와 매연 냄새, 먼지 등 부정적인 냄새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억을 소환한 이들은 공중목욕탕 냄새 등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에 대한 것을 공유했다. 2010년 이후에는 도시화한 삶에 대한 추억이 대거 등장했다. 비온뒤 느껴지는 아스팔트의 향기나 차가운 지하철의 금속 향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설희 감독은 “한국인의 향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는 과정이 힘들었다”며 “관객들이 드나들면서 향이 미세하게 변할 수 있다. 확산하고 경계가 없는 향이 가진 특성이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이 한국관 건립 30주년인 만큼 K미술이 베네치아로 총출동할 예정이다. 한국 작가 이쾌대, 장우성, 김윤신, 이강승 등 30여 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출품한다.
| 지난 ‘베네치아엔날레’ 한국관 전경(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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