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바닥에 누운 남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by장병호 기자
2021.03.17 06:00:00
국립극단 연극 ''X의 비극''
''번아웃'' 빠진 중년 남성 이야기
반복적인 움직임에 담은 현대의 초상
"함게 고민하며 작은 희망 얻어 가길"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마흔네 살의 평범한 직장인 현서는 어느 날 이 한 마디 말을 내뱉고는 바닥 위에 무작정 드러눕는다. 더는 노력하고 매달리고 질주하고 경쟁하며 살고 싶지 않다며 내린 결정이다. 그렇다고 삶을 포기한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안 하는 걸 택했을 뿐이다.
| 국립극단 연극 ‘X의 비극’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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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개막한 연극 ‘X의 비극’은 공연 시작과 동시에 무대에 누워버린 주인공의 모습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의 아내, 아들, 어머니, 친구가 어떻게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달래고 설득도 하고 닦달도 해보지만 그는 일어설 생각이 없다.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듯, 지쳐버린 모습을 바닥에 들러붙은 채 보여줄 뿐이다.
남자는 왜 누워버린 것일까. 제목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제목의 ‘X’는 1990년대 젊은 세대를 대변한 X세대를 가리킨다. 과거 기성세대의 가치와 관습에 반발하며 자유와 개인주의를 내세웠던 X세대가 이제는 현실에 찌든 중년의 기성세대가 됐음을 작품은 현서를 통해 이야기한다. 한때 젊음을 상징했던 X세대가 지친 일상 속에서 바닥에 누워버린 것, 그게 곧 비극이라는 것이다.
물론 작품은 X세대를 마냥 옹호하지 않는다. 현서의 주변 인물들은 현서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서처럼 드러눕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X세대 만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모두가 다 힘달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대 위에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는데, 이는 마치 쳇바퀴 같은 일상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 국립극단 연극 ‘X의 비극’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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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 없진 않다. 시종일관 누워 있던 현서는 단 한 번 일어서려고 시도한다. 아들의 과외 선생인 20대 대학생 애리를 만나면서다. 현서는 평범한 일상마저 꿈꿀 수 없는 애리를 보며 아주 잠깐이나마 잊고 있던 생의 의지를 되새긴다. 이 비극을 이겨내기 위해선 세대를 넘어 서로가 연대해야 함을 작품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국 일어서는데 실패하는 현서처럼 희망은 그리 손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잔혹한 현실도 함께 보여준다. 극 마무리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코로나19 상황을 반영한 결말인데 극 전체 분위기와 다소 떨어져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X의 비극’은 국립극단 희곡 투고 제도인 ‘희곡우체통’의 2020년 초청작으로 선정돼 지난해 낭독공연을 거쳐 올해 정식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실제 X세대였던 이유진 작가가 쓴 희곡을 윤혜진 연출이 무대화했다. 현서 역의 배우 김명기를 비롯해 문예주, 이상홍, 이유진, 송석근, 김예림 등 국립극단 시즌 단원들이 출연한다.
이 작가는 “X세대의 비극에서 출발했지만,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고민하고 작은 희망을 얻어 갈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연은 4월 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