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혁신@미술]<7> 붙잡고 늘어져라 끝까지, 덧칠에 덧칠하는 유화처럼

by오현주 기자
2020.07.31 04:10:00

▲유화의 승리
수채·동양화와 달리 수정·보완 가능한 유화
개선에 개선 거쳐 미술사 위대한 걸작 탄생
혁신은 단칼보다 부단한 수정·개선 통해야
가장 좋은 것은 ''첫''아닌 ''가장 많이 고친'' 것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유화 ‘레오키포스 딸들의 납치’. 루벤스가 1618년경 그린 이 그림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살의 느낌’이다. 그 바탕에 선명한 색채, 역동적 움직임, 생생한 관능미, 드라마틱한 구성을 겹쳐내 바로크 예술의 걸작으로 꼽혀 왔다. ‘그리스신화’ 중 레다와 제우스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레오키포스의 딸들을 납치해 아내로 삼는다는 내용을 줄기로 삼고 있다.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테크 소장.




[이주헌 미술평론가] 유화를 처음 그리는 사람은 물감을 덧칠해갈수록 애를 먹는다. 물은 빨리 마르지만 기름은 천천히 마르기 때문이다. 붓놀림을 더할수록 그동안 바른 물감이 뒤섞여 색이 탁해지고 형태는 뭉개진다. 결국 통제불능 상태에 빠져 그림을 포기하기 일쑤다. 이런 유화 물감을 왜 만들었을까.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이 그 이유를 잘 말해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를 비롯한 유화 걸작들을 보라. 공간의 깊이감은 말할 것도 없고 양감·질감 등이 현실세계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숙련된 화가들은 화면 각 부분의 말라가는 속도를 세심하게 고려해 덧칠한다. 일부러 마르기 전에 붓을 대 색채 혼합을 꾀하기도 하고(‘웨트 온 웨트’[wet on wet] 기법), 경우에 따라서는 캔버스 전체가 충분히 말랐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덧칠하기도 한다. 기법만 잘 익힌다면 유화는 덧칠이 매우 용이한 그림이다. 수십 겹이 아니라 그 이상도 층층이 쌓아올릴 수 있다. 끝없이 수정할 수 있는 그림인 것이다.

반면 수채화 물감은 덧칠을 많이 할 수 없다. 동양화는 덧칠에 더더욱 한계가 많다. ‘일필휘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고치거나 덧칠하기 어려우므로 숙련된 수묵화가들은 높은 집중력과 순발력으로 그림을 단번에 완성한다. 이와 달리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할 수 있는 유화는, 회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서양화가들이 집요하게 추구한 재료 개발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유화가 나오기 이전, 유럽에서 주로 그려지던 프레스코와 템페라화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수채화나 동양화처럼 그림을 덧칠해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화의 이 장점이 어느 분야에서건 혁신을 이룰 때 요구되는 중요한 절차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혁신은 단칼에 이뤄지기보다는 부단한 수정과 개선의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연구가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의 피터 골더와 제라드 텔리스 교수가 1993년에 행한 ‘선구자의 이점: 마케팅 논리인가, 마케팅 전설인가’라는 연구다. 50개 제품 카테고리의 500개 브랜드를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제품으로 시장을 창조한 선구자 기업은 47%, 곧 절반 가까이가 실패한 반면, 바로 뒤이어 시장에 들어가 제품을 개선한 초기 개선자 기업은 오로지 8%만 실패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경쟁체제에서 ‘선구자의 이점’이 매우 클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선구자를 바로 뒤따라가며 개선을 추구하는 게 보다 나은 성공 전략이 될 수 있다. ‘스마트컷’(Smartcuts·2014)의 저자 셰인 스노는 이를 서부개척시대에 비교해 “처음 아메리카 평원을 가로질러간 선발주자는 마차가 지나갈 길을 직접 만들어야 했지만, 후발주자는 바퀴자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한다.

선구자보다 개선자의 혁신 성공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서둘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는 남의 아이디어를 개선하는 게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그 예로 그는 페이스북과 구글의 사례를 든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시장에 마이스페이스와 프렌스터보다 늦게 진입했고, 구글 또한 알타비스타와 야후가 나온 뒤에 검색시장에 진출했지만, 선구자들의 실수를 개선하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조율할 시간을 가짐으로써 훨씬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처음 나온 것’이 가장 오래가는 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오래간다. 가장 좋은 것은 개선이 가장 많이 이뤄진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선구자는 처음이란 그 위치에 만족할 게 아니라 끝없이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유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림을 그리다 보면 밑그림을 잡고 채색을 시도하는 초반에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실수나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그러니 계속 고쳐가며 그릴 수 있다면 결점을 개선해 그림의 완성도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유화가 해결해줬다. 유화는 변화에 무한히 개방돼 있기에 계속 손을 댈 수 있고 결국 처음의 구상과는 차이가 나는 그림으로 완성되기 일쑤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서양미술사의 위대한 걸작들이 탄생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화는 언제 생겨났을까. 현전하는 회화 가운데 유성물감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동굴 벽화’다. 서기 650년경, 안료에 호두기름이나 양귀비기름을 섞어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이집트나 로마에서도 이런 건성유(乾性油)를 사용했지만, 그림 제작이 아니라 의약품 혹은 화장품을 만드는 데 썼다.



2008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로 기록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동굴 벽화’다.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 계곡 인근 동굴에서 찾아냈다. 벽화를 그린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제작시기가 650년경이고 힌두쿠시산맥 자락이란 위치로 볼 때, 당시 교역을 위해 실크로드를 이동하던 미술가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유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네덜란드에서다. 그 이전에도(대략 12세기경부터) 유럽에서는 유성물감을 사용했으나 그 용도는 장식용 도료에 한정됐다. 그러다가 나무패널에 유성물감을 발라 그리는 유화를 15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제작했고, 16∼17세기에 들어서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젤 위에 캔버스를 얹어 그리는 유화가 보편화됐다.

이 시기 유화가 모든 회화의 으뜸으로 우뚝 선 것은, 르네상스 들어 원근법과 광학법칙,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가 급속히 높아져 보다 섬세하고 핍진한 표현에 대한 요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화가 윌렘 드 쿠닝(1904∼1997)은 “유화가 창안된 이유는 바로 (사람의) 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독특한 양감과 질감, 빛깔을 지닌 사람의 살을 표현하는 데 이전의 재료로는 한계가 많았다. 이런 대상을 특유의 촉감까지 환기시키며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붓질을 반복해 다층적인 표현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그 표현에 최적화된 유화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화의 이런 특질과 관련해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서양의 전시문화가 있다. 바로 베르니사주(vernissage)다. 베르니사주는 직역하면 ‘니스 칠하기’인데, 전시가 공식적으로 열리기 전날, 화가들이 전시장에 내걸린 유화에 마지막 손질을 하거나 그림의 보호제인 니스를 바르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오늘날에는 공식 개막 전에 컬렉터와 비평가 등을 불러 친교를 나누거나 마케팅을 하는 자리로 그 의미가 바뀌었지만, 애초에는 이처럼 마지막까지 그림에 손을 대기 위한 자리였다. 동양화였다면 표구까지 하고 전시장에 내걸린 그림에 더 이상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특성상 무한히 작품의 개선을 꾀할 수 있는 유화는 베르니사주 같은 독특한 덧칠문화를 낳은 것이다.

1934년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 열린 베르니사주 날, 아일랜드 화가 존 래버리(1856∼1941)가 액자를 씌워 벽에 걸어둔 전시작품에 가필을 하고 있다. 래버리가 마지막까지 손을 보고 있는 유화작품은 ‘미스 다이애나 디킨슨’(1934)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이처럼 마지막까지 개선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혁신의 승자가 되기 쉽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저 유명한 워싱턴DC 평화대행진을 앞두고 심혈을 기울여 연설 원고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들였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행사 당일 새벽 3시가 되도록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심지어 연단에 올라서기 직전까지 그는 줄을 그어가며 원고를 고쳤다. 마침내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하던 그의 입에서는 원래 원고에 없던 유명한 네 단어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그 문장은 모든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게 역사는 바뀌었다. 그처럼 혁신은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사람들이 만들어온 것이다.

‘세계 첫 유화’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 계곡 인근 동굴에서 찾아냈다. 이 동굴에 그려진 벽화는 50점에 달한다. 그중 12점에서 유성물감의 성분을 확인했고, 2008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란 기록을 공식화했다. 이로써 유화의 시초는 15세기 유럽에서라고 믿어온 가정은 바로 깨졌다. 벽화를 그린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제작시기가 650년경이고 힌두쿠시산맥 자락이란 위치로 볼 때, 당시 교역을 위해 실크로드를 이동하던 미술가들이 아니었을까 짐작은 할 수 있다. 벽화에는 주홍색 가사를 입고 결가부좌한 수천 명의 부처가 원숭이·종려나무잎 등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사실 바미얀 계곡에서 더 유명한 것은 거대한 ‘석불’이다. 2001년 무장단체 탈레반이 ‘우상숭배를 막겠다’며 높이 53m와 38m에 달하는 석불 한 쌍을 산산조각냈는데, 수많은 동굴 벽화가 그때 같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벽화를 복원하던 국제과학자팀이 성분분석을 위해 물감샘플을 채취했고, 바로 거기서 ‘유화의 역사’가 새롭게 쓰였다.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