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파워]"온도계 들고 42.195km 완주..일에 미쳐야 이긴다"

by유재희 기자
2013.11.15 07:30:00

기상청 첫 여성 1급 공무원 조주영 차장 인터뷰
동네예보 시행·기상용 슈퍼컴퓨터 3호기 도입 등 성과

[이데일리 유재희 기자] “겉모습만으로 사람 판단하지 마세요. 정말 독종입니다. 업무 때문에 한 번 이상 혼나 본 사람만이 차장님의 진면목을 알죠”.

조근조근 한 말투와 자상하고 인자한 전형적인 어머니상의 외모, 누구에게나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예의 바른 모습까지. 기상청 64년 역사상 첫 여성차장인 조주영 차장의 첫 인상은 온화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일하는 기상청 직원들의 평가에선 ‘워크 홀릭’, ‘강력한 카리스마’, ‘전투력’ 등 과격한(?)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1984년 7월. 조 차장은 6급 특채로 기상청에 발을 들여놨다. 당시 여성인력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소했다. 그러나 프리미엄은 없었다. 오히려 여자라는 이유로 업무·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그는 연구직 신분이었지만 상사의 커피 타기, 사무실 정리, 전화 응대 등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조 차장은 “여성이라고 무시하는 조직 분위기에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면서 “그때마다 실력으로 내 존재감을 증명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남성 중심의 조직 룰(Rule)을 어떻게 깨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굳어진 그 룰은 너무나 단단하고 헤집을 틈이 없었다. 그는 결국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들만의 룰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보다 2~3배 더 열심히 죽기 살기로 일한 것이다.

그의 근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준비를 위한 태스크포스(TF)팀에 합류하면서부터다. 조 차장은 코스의 기온 환경을 점검하기 위해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온도계를 들고 걸어서 완주했다.

이후 기상 관측 표준화법 제정, 동네 예보 시행, 기상용 슈퍼컴퓨터 3호기 도입 등 굵직한 일들을 맡아 깔끔한 일솜씨로 명성을 날렸다. 이처럼 일에 빠져 살다 보니 조 차장은 1998년 이후 여름휴가를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조 차장은 “여름 휴가철은 장마 및 태풍 시기와 맞물려 가장 바쁠 때”라며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휴가를 가겠냐?”며 웃었다.

조 차장이 일군 성과 중 하나가 ‘동네예보’다. 2008년 10월 말 기상청은 많은 기대와 우려 속에서 동네예보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조 차장이다.

동네예보는 4~5년간의 준비 과정과 시범 운영을 거쳤지만, 시행 여부가 불투명했다. 대내외적으로 ‘예보 정확도’에 대한 우려가 컸고, 기상청 입장에서도 ‘잘해야 본전’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정순갑 신임 기상청장은 동네예보 시행을 강행했고, 이 업무를 진두지휘할 적임자로 조 차장을 지명했다. 하지만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6개월이라는 짧은 준비 기간과 부족한 예산, 부정적인 여론 등 곳곳이 암초였다.

지금은 읍·면·동의 행정구역별로 3시간 간격의 상세예보를 볼 수 있는 동네예보가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시행 당시만 해도 우려의 시선이 더 많았다. 기상청 예보에 대한 불신이 높은 상태에서 상세 예보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조 차장은 “오랜 기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보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며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동네예보 시행을 반대하는 여론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결국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만나 소통하고 설득하면서 소통의 리더십을 배웠고, 성공적으로 동네예보를 출범시켰다. 조 차장은 “그 당시 동네예보 시행과 기상용 슈퍼컴퓨터 3호기 도입 시기가 맞물리면서 업무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다”면서도 “그때가 가장 보람 있고, 큰 성취감을 느낀 최고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조 차장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최초’다. 기상청 최초의 여성 예보관, 여성 국장, 여성 지방기상청장, 여성 차장 등 홀로 길을 개척하며 걸었다.

그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이 비결”이라며 “이제는 내가 여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조 차장은 “여성이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인정받으려면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자기 주변에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 스스로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성과 성취형 인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요즘 일에 대한 열정과 욕심이 부족한 후배들을 보면 너무 아쉽다”며 “여자니까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조 차장은 워킹맘이다. 그는 가장 큰 고민거리로 일과 가정의 양립을 꼽았다.

“모든 워킹맘들의 고민은 같을 거예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라는. 일에 욕심을 내면 가정에 소홀해지고, 가정에 충실하다 보면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요. 저도 결혼 초기 모든 걸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고민 끝에 결국, 선택과 집중을 택했어요. 일에 7을, 가정에 3을 할애하되 가정생활에서 집중해야 할 대상을 좁히고, 그 대상에 최선을 다하는 길을 택했죠.”

그의 가족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은 하나뿐인 아들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고, 살뜰히 잘 챙겨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초기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들의 학창시절이 평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책도 크다.

조 차장은 “바쁜 엄마 탓에 빈자리를 많이 느꼈을 텐데 착하고 바르게 성장해 줘 고맙고 미안하다”며 “부모가 열심히 사는 것을 보면서 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

조 차장은 여성 리더가 늘어나려면 여성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밤늦도록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보육시설 확충과 집안에서의 가사 노동 분담, 직장에서의 기회균등 부여 등의 배려가 필요한 것 같아요. 특히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양육, 교육 지원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충남 서천 출생으로 상명여고와 연세대 천문대기과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기상직 6급에 특채돼 예보정책과장, 수치모델관리관, 기후과학국장, 강원지방기상청장 등 핵심 보직을 두루 거쳐 지난 4월 차장으로 임용됐다. 조 차장은 기상청에서 수치예보시스템 개선, 동네예보 시행, 기상용 슈퍼컴퓨터 3호기 도입 등 주요 역점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주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