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10.06.12 15:10:41
[조선일보 제공] 경부고속도로와 사임당길이 만나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33-4, 5번지. 납량 특집 영화에나 나올 법한 9층 건물이 괴기스럽게 서 있다. 외벽은 원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짙은 회색이다. 주변 아파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건물을 둘러싼 높이 약 3m의 차단막 위로 '도심 XX 시대 개막!'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건물 안 유리는 깨져 있고 군데군데 철근이 튀어나와있다. 심은 건지 그냥 자란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무가 무성(茂盛)하다.
이 건물이 방치된 지 16년째다. 3.3㎡당 수 천만 원이 넘는 서초동 한복판에서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원래 이 자리의 주인은 여원(女苑) 잡지사였다. 1989년 기존 건물을 증축하다가 온천 줄기가 발견됐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온천이 나왔으니 개발 이익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됐다. 서초구청에 따르면 공사 도중 여원은 그전에 갖고 있는 빚을 처리하지 못했고 1992년 부도가 났다. 급기야 1995년에는 공사가 중지됐다.
그 이후 회원권을 산 사람, 임대권을 가진 사람, 시공사, 공사 하도급자, 금융회사 등이 얽히고설킨 빚잔치가 벌어졌다. 그러나 빚잔치를 벌이려고 해도 여원에는 남은 돈이 없었다.
결국 토지와 건물을 분리해 경매에 부쳤는데 여기서부터 계속 꼬였다. 토지를 경매 받은 사람이 투자자들로부터 낙찰받을 돈을 받은 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기존 채권자, 채무자 외에 또 다른 채권자, 채무자가 생겼다.
이런 식으로 늘어난 이해 당사자가 건물 200여명, 토지와 관련해서는 150여명이라고 한다. 소송에 소송이 꼬리를 이어 사건 건수만 30건 이상이라고 한다. 이러니 토지와 건물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채권자들에 따르면 문제가 없다면 1882.8㎡(570여평) 토지에 건물까지 해서 300억원 이상 나갈 물건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요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해결 기미가 보인다는 설도 간간이 있다. 현재 사고 싶은 사람이 간간이 채무자들이나 구청에 문의를 하고 있고 토지와 관련된 또 다른 경매도 이뤄질 예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건물에 불만이 많은 근처 주민들은 믿지 못한다.
16년의 세월만큼 믿기 어려운 일도 있다. 그 중 하나는 현재 건물에 대해 유치권(일종의 점유권)을 가진 이해당사자측이 폐허를 24시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적대적인 다른 세력이 건물을 철거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다.
순번을 짜서 먹고 자면서 지키는데도 도둑이 자주 든다고 한다. 폐허 속에서 굴러다니는 값비싼 구리 덩이 때문이다. 채권자들에 따르면 서초구청이 이 땅을 사려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청 내에 온천물도 나오니 구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복지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실제로 추진도 됐었다. 그러나 구청이 제시한 가격에 이해당사자의 일부는 찬성하고 일부는 반대해 결렬됐다고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