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쳐야 산다…지분 모아 상장사 움직이는 개미

by김인경 기자
2023.03.08 06:00:00

일신방직, 자사주 소각·배당 확대 등 받아들여
한국철강도 소액주주들 의견 일부 수용
카카오톡서 모이고 헤이홀더서 의결권 위임
"상장사 가치 보다 주가상승에만 초점" 목소리도

[이데일리 김인경 기자] 3월 주주총회의 주인공은 과연 개미가 될 수 있을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주식시장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개미들이 2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개미들이 본격적으로 상장사에 배당 확대와 감사 등 이사 후보 추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며 주주권리를 행사하는 모습이다. 이제까지 주가의 상승에 따른 차익을 실현하던 개인투자자들이 투명한 지배구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코스피 상장사 일신방직(003200)은 보통주 13만 4000주를 공개 매수 방식으로 취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주당 가격은 15만 원으로 총취득 금액은 201억 원이다. 아울러 이미 취득한 자사주 7만2000주(약 61억원)를 소각하기로 했다. 보통주 1주당 5000원(시가배당률 4.65%)을 배당하고 유통 주식 수 증가를 위해 1주당 가액을 5000원에서 500원으로 조정하는 주식분할도 단행했다.

일신방직의 이 같은 파격적인 결정은 소액주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일신방직 주주연대는 지난해 12월 21일 사측을 대상으로 주주 제안을 내놓은 바 있다. 소액주주들의 요구사항은 △자기주식 500억원어치를 17만 원에 공개 매수 한 후 소각할 것 △회사 소유 미술품 목록 공개 △유동성 공급을 위한 액면 분할 △감사인 교체 등이 주 내용이었다. 소액주주들이 모은 지분율은 지난해 말 잔액증명서 기준 3%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일신방직이 소액주주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최대주주와 특수 관계자의 지분율이 50.28%에 이르는 기업도 이같은 제안을 수용한 것을 주목하고 있다. 대주주 지분율이 높다고 해서 소액주주의 요구를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한국철강(104700) 역시 주목할 만하다. 한국철강의 소액주주연대는 △배당금을 250원에서 1000원 수준으로 확대하고 △1000억원의 자사주 매입 및 소각과 △감사위원 중 1명은 주주총회 결의로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임하도록 해달라 요구했다. 한국철강 이사회는 배당금 확대와 감사위원 선임안건을 주주총회에 상정키로 했지만, 자사주 매입과 소각은 받아들이지 않아 소액주주들은 의안상정 가처분 신청을 낸 상태다.

이외에도 한국알콜(017890), DB하이텍(000990), 신풍제약(019170), 광주시네계 등의 소액주주들이 의결권을 모아 주주제안에 나선 상태다. 시장에서는 개인투자자들이 자산운용 등 행동주의 펀드의 지분도 크지 않은 중소형주를 움직이는 새로운 주체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상법상 의결권이 있는 지분 3% 이상을 확보하거나 6개월 전부터 1% 이상을 보유하면 주주제안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주 제안은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주총회 안건으로 올리면 된다.

소액주주들이 지분 3% 이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개인투자자들이 뭉치기 좋은 정보기술(IT) 환경이 펼쳐진 덕분이다. 먼저 각종 주주게시판이나 카카오톡 오픈대화 등을 통해 소액주주들이 상장사에 대한 생각을 개진하기 쉬워졌다. 현재 한국주식투자자연합(한투연)에 따르면 소액주주 모임은 약 30개에 이른다.

의결권을 모으기도 쉬워졌다. 예전엔 직접 의결권 위임을 받아야 했지만 ‘헤이홀더’ 등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작업을 간소화했다. 헤이홀더는 마이데이터를 통해 증권사 계좌와 연동하는 방식으로 실제 보유하고 있는 종목과 주식 수를 파악하도록 해 신빙성을 확보했다. 신풍제약은 헤이홀더로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모아 이달 9일 이사회에 주주 제안을 발송하기도 했다. 한국알콜의 소액주주인 2명의 대학생이 ‘한톨’이라는 플랫폼을 만들어 의결권을 위임받은 후 주주 제안을 발송했다.

김준석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자본시장은) 지배주주를 견제할 수 있는 소액주주 권리보호 수단, 이사회 기능, 기관투자자 기반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서라도 투자자의 적극적인 역할은 필수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일각에선 소액주주들의 요구가 개별 상장사의 성장이나 가치 증대보다는 주가 상승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주주총회 중 주주제안이 제기된 회사는 41개사, 총 100건 이상의 안건이 상정됐다. 이 중 이사 등 후보를 추천하는 내용이 25개사(61%)로 가장 많았다. 정관 변경의 건(16개사·39.0%), 배당 및 자사주 취득, 소각 요구 등(14개사·34.1%), 이사 등 해임 건(6개사·14.6%)이 뒤를 이었다.

이재혁 상장회사협의회 본부장은 “E나 S 분야의 주주제안이 많은 미국이나 정관변경에 대한 요구가 많은 일본과 달리 국내에서는 감사나 감사위원을 추천하는 경영권 공격이 주를 이룬다”며 “이런 제안은 회사의 본질적 가치를 높인다기보다 주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