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완벽한 비서’가 된 경단男[정덕현의 끄덕끄덕]

by최은영 기자
2025.02.20 05:00:00

'경단녀' 현실 비튼 드라마 속 판타지
싱글대디 통해 돌봄 노동의 가치 그려
남성 육아휴직 7.4%에 그치는 한국
육아·가사 소중히 여기는 사회 됐으면

[정덕현 문화평론가] 요즘 아저씨의 정석? 줄여서 이른바 ‘요아정’이라 불리는 대열에 배우 이준혁이 합류했다. 사실 ‘요아정’은 MZ(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서 유명한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명이지만 최근 영화부터 드라마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는 1980년대 초반생 남자배우들로 재해석됐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와 ‘조명가게’,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로 최근 연달아 주목받은 주지훈이나 영화 ‘검은 수녀들’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2’, ‘나의 해리에게’에 출연한 이진욱, ‘오징어 게임’, ‘트렁크’의 공유, 영화 ‘하얼빈’,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의 이동욱 같은 배우가 그들이다. 이 대열에 최근 들어간 이준혁은 ‘비밀의 숲’에서 대중의 눈도장을 찍은 후 그 스핀오프로 제작된 ‘좋거나 나쁜 동재’를 거쳐 최근 ‘나의 완벽한 비서’로 대세 배우로 떠올랐다.

나의완벽한비서
뚜렷한 개성으로 자기 색깔이 확실한 이준혁이 연기 잘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렸지만 최근 그가 대세 배우로 떠오른 데는 ‘나의 완벽한 비서’라는 작품 속 유은호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일조했다. 유은호는 홀로 딸을 키우는 싱글대디다. 지난 몇 년간 결혼관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싱글맘이나 싱글대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은호라는 싱글대디가 달리 보였던 건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그 육아와 가사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인가를 드러내면서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판타지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유은호는 대기업 인사팀에서 상사에게 촉망받는 회사원이었지만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아이가 그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이야기에 육아휴직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그를 추락하게 만든다. 아빠와 충분한 시간을 보낸 아이는 괜찮아졌지만 복직한 그는 육아휴직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된 상사로부터 미움받아 왕따를 당하고 결국 퇴직하게 된다. 주로 여성들이 육아휴직으로 인해 회사 복직이 어려워지는 이른바 ‘경단녀’가 되는 현실이지만 유은호는 싱글대디로서 그 현실을 경험하는 인물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여기에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판타지를 더해 넣는다. 유은호의 집에 초대받은 한 이사가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과 아이의 스케줄표, 더 나아가 너무나 정갈하게 준비된 음식 등을 보고는 그를 자신이 다니는 회사 대표의 비서로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일로 시청자들에게 강력한 판타지를 안겼다. 육아와 가사 같은 돌봄노동을 당연시하며 따라서 그 가치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현실을 뒤집고 있어서다. 그 이사는 유은호가 싱글대디로서 해온 돌봄노동의 가치를 이른바 ‘경력’으로 인정한 것이고 실제로 그 경력은 비서로서 맹활약하는 그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그려진다. 사장은 물론이고 직원들까지 일을 챙겨주고 또 고충을 들어주기도 하는 그 능력이 다름 아닌 돌봄노동의 경험치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육아휴직 같은 돌봄노동을 하고도 ‘경력 단절’을 겪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판타지가 된다. 그 누가 과연 “놀았다”는 한마디로 그 값진 노동의 시간을 폄하할 수 있겠느냐마는 냉정한 우리 사회는 늘 그런 식으로 돌봄노동을 ‘놀았던 시간’으로 치부하며 ‘단절’을 이야기하지 않던가.



지난 14일 종방한 SBS 금토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 포스터.(사진=스튜디오S·이오콘텐츠그룹)
‘나의 완벽한 비서’는 물론 남성비서인 유은호와 여성대표인 강지윤(한지민)의 달콤한 사랑과 일터에서의 성장을 그리는 오피스 로맨스 드라마다. 트렌드에 민감한 멜로드라마가 유은호라는 ‘돌봄 노동’의 가치를 아는 남성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실제로 그런 남성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남성이 많았으면 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고, 나아가 남녀를 떠나 육아와 가사 같은 돌봄 노동이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였으면 하는 욕망 또한 담겨 있어서다.

지난해 말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육아휴직통계’를 보면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7.4%에 머물렀다. 물론 이 수치는 전년 대비 0.3% 상승한 것이고 2015년 그 사용률이 고작 0.6%였던 것과 비교하면 꽤 높은 수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이 73.2%라는 걸 염두에 두고 보면 그 차이가 너무 커 아직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무려 75%에 달한다. 한국은 이에 비해 10분의 1도 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스웨덴의 남성과 여성을 통틀어 육아휴직 사용률이 높은 이유는 사회가 생각하는 육아와 가사 같은 돌봄 노동의 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는 직장에서도 아이가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사회적 분위기로 정착해 있다고 한다. 즉 회사에서도 아이가 학교에서 중요한 행사를 하게 되면 남성이고 여성이고 상관없이 그 행사에 우선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문화가 마치 스웨덴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래서 유교적인 문화 속에서 가부장제 시스템이 오래도록 유지된 우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오인한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고 착각이다. 스웨덴 역시 1970~1980년대에는 출생률이 1.6명까지 떨어지는 저출생의 위기를 겪었다. 그로 인해 노동력이 감소하고 복지 재정이 악화하는 등의 위기가 예고되자 정부는 육아휴직 확대와 휴직 중 급여 보장, 보육시설 확대, 기업의 육아 친화 정책 요구 등 강력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 정책의 밑바탕에는 어떤 아이도 도태되지 않고 저마다의 능력을 발휘하는 인재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와 기업 모두가 공감대를 갖게 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아이를 위한 부모들의 ‘돌봄 노동’ 역시 그 가치를 비로소 제대로 인정받게 됐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은호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반색했겠지만 그 판타지가 부각하는 우리네 현실과의 괴리는 오히려 씁쓸한 면이 있다. 그 판타지가 현실이 되려면 내 아이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아이를 소중한 미래로 바라보는 문화적 풍토 조성이 절실해 보인다. 정책 또한 바로 이 관점을 먼저 전제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