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통제탑에서 관계망의 중심으로

by문화부 기자
2014.08.11 07:19:12

[박광무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영화 ‘빠삐용’의 배경이 된 악마의 섬 교도소에는 높은 감시탑이 있다. 어떤 죄수도 감시를 피해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비롯한 중세기 이후의 모든 교회당에는 첨탑이 있다. 교회당의 첨탑은 하늘을 향한 신앙의 염원과 더불어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것처럼 종탑의 역할을 겸하였다. 때로 이것은 망루도 되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유명 관광지인 고성에는 망루가 있다. 망루는 적의 침략을 미리 파악하는 관측소이자 교신의 역할을 겸하였다. 공항에는 관제탑이 있다. 비행기 이착륙을 종합적으로 통제하는 탑이다. 망루도 관제탑도 아날로그시대의 시설물이다. 오늘날 이들은 더이상 본래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 대부분이 교육과 관광목적의 역사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디지털과 정보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모든 관제와 통제의 수단과 형태가 바뀌고 있다. ‘컨트롤타워’가 아니라 ‘관계망의 중심’, 즉 ‘네트워크센터’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컨트롤이 필요한 경우에도 최소화하고 센터로서의 공간적·기능적 역할이 중시된다. 이러한 상황에 전자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는 오늘날 정책의 시행 혹은 정부기구를 설치·운영하는 데 통제탑, 즉 컨트롤타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난센스라고 본다. 스마트폰을 지닌 21세기의 개개인은 정보생산과 사용의 주체로서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뿐 아니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지구 차원에서 순식간에 집합의견을 수렴해내기도 한다. 나이와 직업과 세대를 뛰어넘어 그들은 관계망의 중심이 돼 이 시스템을 자유롭게 작동시킨다.



과거에 소수 권력자가 독점하던 통제권을 이제는 개개인이 동시다발적으로 소유하고 누리고 있다. 누가 누구를 통제하고 감시한단 말인가. 정보화의 기술과 장치를 오용하면 ‘큰 형’(big brother)이 출현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이를 견제하지 못할 때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역사를 오도할 것이다. 국가기밀이 아닌 생활정보는 전면적인 공개와 활용이 되어야 하며 이때 강력한 경쟁력이 생긴다. 나아가 정보의 오남용과 권력화의 유혹을 막고, 오히려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창조하며 경제적 이익도 창출한다.

국가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도 과거에는 정부가 중심에 서서 역할을 해왔다. 이제는 이를 거버넌스 구조에서 풀어나간다. 정부가 장을 펼치고 시민사회단체가 마음껏 요구와 지지를 표하고 의견을 개진하면 이를 수렴하여 최선의 대안을 선택한다. 전자민주주의 시대의 개별 주체는 관계망의 중심에서 새로운 창조와 혁신을 이끈다. 규제 혁파의 성과는 정책정보의 개방 효과와 더불어 모든 국민을 네트워크시대의 중심으로 이끈다. ‘나를 따르라’는 지휘명령체계는 전자민주주의 시대에 적합성을 잃고 있다. 417년 전 이순신 장군의 솔선수범 리더십과 진정성이 수군과 민초들의 마음을 얻었을 때 탁월한 지략과 정보력, 더불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를 만들어내고 풍전등화 같은 민족을 구해내었다. 지금은 “함께 가자. 새로운 미래의 행복을 함께 만들어가자”라는 리더십이 빛나는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