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1일 오후 5시, 서울 신사동 D 논술학원 입구에서 팸플릿을 나눠주던 정모(여·28)씨는 “아침 7시부터 종일 서서 일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었다”고 했다. 지난 2004년 2월 대구 소재 국립 경북대학의 인문계열을 졸업한 뒤, 취직하러 상경(上京)한 정씨는 작년 말부터 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다. 서류 정리, 교재 복사 등 대졸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순 업무다.
“졸업 후 2년간 대기업·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낸 입사원서가 200장이 넘는데, 10곳을 지원하면 면접 오라는 곳은 1곳도 안 돼요.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토익 점수가 900점대 초반으로 괜찮은 편인데도, ‘지방대 출신에 여자’라는 이유로 다들 외면합니다.”
주 6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면서 정씨가 받는 급여는 월 110만원. 시간당 3800원꼴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는 조금 더 받는 편이다. 하지만 고시원 월세 35만원과 부모님께 보내는 용돈을 떼고 나면 식대며 교통비 쓰기도 빡빡하다.
정씨는 작년 가을, 직원 6명인 소형 출판사에서 몇 달간 교열직 일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 사정이 나빠져 두 달치 월급을 못 받은 채 다시 구직(求職) 대열에 나서야 했다. 대학 다닐 때 정씨의 목표는 외국계 기업에 취직하는 것. 그러나 지금은 정규직이기만 하면 중소기업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사례2. 지난 2월 서울 소재 사립 S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백모(28)씨는 졸업 후 두 달도 안 돼 취업의 꿈을 접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친척이 근무하는 관광회사며, 동네 할인마트 정규직 등 20곳에 원서를 넣었는데 다 떨어졌어요. 경기가 풀리는 내년쯤 다시 취직하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 사무실에 나가는 중입니다.”
가끔씩 아버지 친구라도 찾아오면 아버지가 ‘실업자 아들 두었다’고 창피해할까 봐 백씨는 사무실에서 조용히 빠져 나온다고 했다. 본인도, 아버지도 백씨가 실업자라고 생각하지만, 통계청 기준에 따르면 그는 ‘무급(無給) 가족 종사자’로 간주돼 취업자로 분류된다. 정부가 발표하는 취업통계가 그만큼 부풀려져 전달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일자리의 양(量)과 질(質)이 동시에 나빠지는 ‘동반악화’의 함정에 빠져 있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창출된 일자리 수는 총 29만9000개. 2004년에 만들어 낸 일자리(41만8000개)보다 11만9000개 줄었다.
성장에 제동이 걸리면서 경제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취약해진 결과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일자리의 내용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손민중 연구원은 “만들어진 일자리도 저임금 임시직이나 파트타임 서비스직 등에 몰려 있어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가 출범한 후 3년간 만들어진 서비스 부문 일자리 개수는 94만 8천개. 정부가 서비스업의 고용창출 능력이 뛰어나다며, 서비스 부문에 각종 지원책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이중 전체산업 월 평균임금(240만4000원)에 못 미치는 저임금 일자리가 79만6000개로, 전체의 84%에 달했다. 새로 만들어진 서비스 일자리 5개 중 4개가 전체 근로자의 평균 삶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저질(低質)의 일자리라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근로자 중에서 전체 평균임금의 66% 이하를 받는 ‘저임금 근로자’ 비중은 26.8%에 이르러 주요 선진국의 8~16%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동국대 김종일 교수는 “설사 정부 목표대로 각종 공공근로 정책 등을 통해 매년 일자리가 30만~40만개씩 창출된다 하더라도, 시장에 공급되는 일자리의 대부분이 저임금 서비스직에 불과하다면, 성장과 분배 어느 쪽으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