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인간의 삶과 역사를 지배한 '신(神)의 메시지'

by김무연 기자
2020.06.16 04:00:00

지상 강의 : ‘인더스토리’ 6강 시(時)
권력자와 종교가 독점하던 ‘시간’, 르네상스 거치며 대중화
정확한 시간을 향한 레이스…갈릴레오의 진자에서 원자시계까지
시간으로 공간을 읽다…GPS 기술로 절대 위치 포착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 시간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노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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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룩소 신전의 오벨리스크. 사라진 한 쪽은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 있다.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프랑스의 루이 필립 1세는 이집트 룩소 신전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가져왔다. 약탈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대신 이집트에 당시 최신 기계식 시계를 선물했다. 오벨리스크와 기계식 시계를 맞교환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오벨리스크가 시간을 읽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추측했고, 시간을 알려주는 태양을 최고의 신(神)인 ‘라’로 숭배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물을 담은 용기에 구멍을 내 수위의 변동으로 시간을 재는 물시계 ‘펜잔’(Fenjaan)을 사용했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를 발전시킨 물시계 ‘클렙시드라’(klepsydra)를 고안했다.

임규태 박사는 “고대인에게 시간은 신이 주는 메시지였다”라면서 “권력자들은 이 정보를 독점해 백성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수가 독점하던 시간 정보가 다수 대중에게도 허용되는 과정에서 인류의 역사도 격변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고 짚었다.

교회 종탑
392년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가톨릭을 국교로 지정했다. 이때부터 유럽은 가톨릭이 지배하는 종교의 시대로 진입했다. 유럽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은 시간 정보를 독점해 농노들을 통제했다. 농노들은 교회 종소리에 따라 일을 시작했고 점심을 먹었으며 예배를 봤다. 시계를 나타내는 단어 ‘클락(Clock)’의 어원이 ‘때리다’인 이유는 수도사들이 친 종이 중세 유럽의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가톨릭의 권위가 약화하고 인본주의가 발현한다.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르네상스 당시 유럽인들은 신을 찬양한다는 명목으로 경쟁적으로 대규모 건축물을 건설했다. 종이 매달렸던 교회 첨탑 자리는 다양한 기능을 지닌 시계로 대체된다. 체코 프라하의 천문시계가 대표적이다. 이때부터 시계는 더 이상 ‘때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와치·Watch)로 바뀐다.

1504년 독일의 시계 제작공 피터 헨라인은 최초로 휴대용 시계를 발명한다. 교회가 독점하던 시간 정보가 대중에게 넘어가는 시발점이다. 임 박사는 “시간의 대중화는 신의 메시지가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정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라면서 “르네상스 이후 본격적으로 시계를 바탕으로 한 산업이 융성한다”라고 했다.

프라하의 천문시계
시계 산업이 본격화한 배경에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종교 전쟁이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며 종교 개혁이 시작됐다. 루터와 더불어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장 칼뱅은 1536년 ‘기독교 강의’라는 책을 내 가톨릭을 비판했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 칼뱅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프랑스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간다.

칼뱅의 사상은 철저한 금욕주의가 바탕에 깔려있었다. 칼뱅은 귀금속 등 사치품 사용을 엄금했다. 단 예배 시간과 하루 일과를 위해 시계만은 지닐 수 있도록 했다. 사치품 금지로 위기를 맞은 스위스 귀금속 업자들은 종교 개혁이 촉발한 위그노 전쟁을 피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피신 온 시계공들과 손잡고 시계 산업을 부흥시킨다. 스위스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세계 시계 산업의 중심이 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인이 차던 손목시계
이후 시계 산업은 주머니에 넣는 회중시계가 주류를 이루었다. 리바이스 등 유명 의류업체들도 바지 주머니에 회중시계를 넣을 수 있는 이중 주머니를 만드는 등 패션도 회중시계에 맞춰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회중시계 일변도의 시장을 송두리째 바꿨다.



1차 세계대전부터 자동차가 전장에 투입되며 기동성이 혁신적으로 향상됐다. 넓어진 전선에서 합동 작전을 진행하려면 아군끼리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시계는 주요 전시 물자로 떠올랐고, 전장에서 수시로 시계를 봐야 했던 군인들은 회중시계를 손목에 묶고 다니기 시작했다. 손목시계의 등장이다. 영세 중립국으로 전쟁의 포화를 피해 간 스위스는 손목시계 산업으로 다시 한 번 시계 강국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피사 성당의 샹들리에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사 성당의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진자 운동을 발견한다. 진자 운동이란 고정된 한 축이나 점의 주위를 일정한 주기로 진동하는 운동을 뜻한다. 진폭이 달라도 왕복하는 속도는 늘 일정하다는 원리(진자의 등시성)는 시계의 정확도를 한층 끌어올리는 변혁을 가져왔다.

1656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시계 작동 장치인 밸런스 스프링(Balance spring)을 발명한다. 밸런스 스프링은 탈진기(밸런스·진자의 1주기마다 지침을 회전시키는 장치)를 진동하게 만드는 작은 스프링이다. 시계의 심장 역할을 하는 밸런스 스프링의 등장으로 고정된 진자 운동을 휴대용 시계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브레게가 발명한 오버코일
문제는 밸런스 스프링의 내구성과 정확도가 진자운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1795년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스프링을 꽈서 한쪽 끝단을 나머지 끝단에 연결하는 오버 코일을 발명했다. 오버 코일 방식의 밸런스 스프링은 동심원을 그리며 균일하게 감을 수 있었고, 코일 길이가 길어질수록 시계의 정확도와 내구성도 함께 향상됐다. 임 박사는 오버 코일의 발명을 ‘현대 기계식 시계의 완성’이라고 평했다.

1927년 벨 연구소에서 쿼츠 시계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시간 정확도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쿼츠 시계는 전기를 가하면 떨리는 석영의 성질을 이용하며, 석영이 32768번 진동하는 시간을 1초로 환산한다. 1969년 일본의 세이코가 최초로 쿼츠 시계의 상업화에 성공한다. 반도체 기술의 발달로 저렴한 가격과 월등한 정확도로 무장한 쿼츠 시계는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 시장을 초토화하며 쿼츠 쇼크를 일으킨다. 이때 몰락한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정확도 경쟁을 포기하고 명품 시계에 집중하면서 부활한다.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쿼츠시계 세이코의 아스트론
1955년 영국 국립 물리 연구소가 원자시계를 발표하면서 가장 정확한 시간을 제공한다는 쿼츠 시계의 명성은 불과 30년 만에 무너진다. 세슘 원자가 91억9263만1770번 들뜸과 바닥을 반복하는 것을 1초로 정의하는 원자시계는 3000만 년에 1초의 오차를 나타낼 정도로 정확하다. 원자시계는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될 수는 없었지만, 인공위성에 탑재되면서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

1983년 대한민국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해 알래스카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거쳐 김포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인근에서 소련에 격추된 것. 당시 비행기에는 미국의 래리 맥도널드 상원의원이 탑승해 있었다. 강대국 간 국제 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조사 결과 대한항공 007편의 관성항법장치가 고장이 난 것으로 밝혀졌다. 항공기에 탑재된 관성항법장치에 오류가 축적되면서 항로가 잘못 설정되어 소련 영공을 침범한 것이다. 이 사건 직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군사용으로 개발 중이던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전 지구 위치 파악 시스템)를 민간에 우선적으로 개방할 것을 공표했다.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 시간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노진환 기자)
GPS는 다수의 인공위성이 보내는 신호들의 시간차를 이용해 현재 위치를 특정 하는 기술이다. GPS 인공위성은 위성의 궤도정보와 위성 신호가 발신되는 시간을 송출한다. 수신자는 위성으로부터 받은 신호를 해독하여 발신 시간과 실제 수신 시간 차이를 측정하고 전파의 속도에 대입하면 정확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 이 과정을 3대 이상의 위성에 반복하면 3각 측량 원리에 의해 자신의 절대적인 위치를 계산할 수 있다.

임 박사는 “예전에는 시간 정보가 단지 정확한 시각을 제공하는데 그쳤지만, GPS 기술의 등장으로 정확한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내비게이션이나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모두 GPS를 이용한다. 그만큼 시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