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왜 이러고 있어…처음처럼 가야지"

by오현주 기자
2016.01.18 06:06:00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부장] 노인 목수가 땅바닥에 집을 그리고 있더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충격이었단다. 다름 아닌 집을 그리는 순서 때문이었다는 건데. 주춧돌부터 시작한 목수는 맨 나중에 지붕을 그리며 그림을 마무리했는데 이는 보통 우리가 집을 그리는 순서와는 정반대. 일하는 사람의 집그림이 집짓는 순서와 같다는 것이 못내 놀라웠다는 얘기다. 이 장면에서 생긴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단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는데도 아무 의심 없이 지붕부터 그려온 무심함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서화 중 한편이다.

오래 묻어둔 기억을 하나씩 들춰내다가 결국 잠을 설쳤다. 엉킨 기억은 1990년 어느 날에 도착해 있었다. 한 선배에게서 책 한 권을 받았다. 저자는 신영복. 제목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의 글이라면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가 더 유명한데.”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던 것도 떠올랐다. 사실 당시는 누군가의 감옥행이 엄청난 일도 아닌 불운의 시절이지 않았나. “베갯머리에 두기에 좋을 거야.” 갑자기 선배의 뒷말이 울렸다.

그 말대로 한동안 머리맡에 책을 둬봤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가 않았다. ‘잠들기 전 조금씩’이 당최 되질 않았던 거다. 스물일곱에 영어의 몸이 돼 마흔일곱에 풀려났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옥살이로 다 보낸 셈이다. 이럴 때 대개 인생은 두 갈래다. 악에 바친 복수의 신이 되거나 ‘다 용서하마’의 초인이 되거나. 그는 누가 봐도 뒤의 경우였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이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이 이것뿐이었나. “고립돼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세칭 옥살이란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게 표출돼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이것이 쏟아 낸 ‘욕’의 전부라니. 하지만 결국엔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려는 의도를 읽어낸 거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출소 후 30년을 채우지 못하고 지난 15일 그가 떠났다. 수인생활 동안 꺼낸 말을 한마디도 거스르지 않은 세월을 마감했다. 지난 30년은 온통 뒤죽박죽이던 사회에 그만의 휴머니즘을 던져온 시기였다. 결국 그의 판단이 맞았나 보다. 그가 타계한 뒤 세상은 온통 그에 대한 고마움을 꺼내놓기에 여념이 없다.



앞서 정확히 한주 전에 먼저 떠난 이도 있다. 원로배우 백성희. 굳이 신영복과 비교하자면 ‘나은 삶’이겠지. 최소한 묶였던 적은 없으니. 하지만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노배우를 추억케 하는 건 단연 연극 ‘3월의 눈’이다. 여든 중반이 무색하게 그녀는 보란 듯 무대에 서서, 손자를 위해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파는 노부부로 나섰다. 눈 내리는 3월의 아침, 남편은 집을 나서며 아내를 향해 독백을 쏟아낸다. “이젠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도 다 비우고 가게.”

세월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수는 여기에 있다. 소란하지 않게 그들이 멈춰 세운 시간에서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감동을 동시에 받는 거다. “이 사람아, 왜 여기 이러고 있어… 거기서라도 한숨 푹 주무시고 자다 일어난 듯 돌아오게”(백성희의 ‘3월의 눈’).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신영복의 ‘처음처럼’).

두 죽음이 다져둔 인생의 철학은 분명하다. 세상에 감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것, 무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란 것. 올해는 시작부터 많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