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in][4th 이슈]닭과 돼지, 막오른 영토전쟁

by김세형 기자
2011.08.17 08:09:42

조류독감ㆍ구제역 회오리

마켓in | 이 기사는 08월 17일 07시 39분 프리미엄 Market & Company 정보서비스 `마켓in`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이데일리 김세형 기자] 삼겹살이 금겹살이 됐다. 좀처럼 가격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해외 수입 물량을 퍼부어도 그렇다. 지난해 말 양돈 농가를 휩쓸고 간 구제역이 낳은 결과다. 빨라야 2013년 초에나 구제역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구제역은 비단 식탁만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양돈산업 자체도 구조적 개편에 직면하고 있다. 이미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몇몇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침투하고 있다. 산업화가 진행된 양계산업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육계업계 강자 하림과 사료에서 출발한 이지바이오, 그리고 수산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조그룹이 선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육계 역시 더욱 치열해지는 모습이다. 닭과 돼지를 둘러싼 기업들의 본격적인 영토전쟁의 막이 올랐다.


우리나라보다 앞선 선진국의 축산업은 닭과 돼지, 소 순서로 기업화가 진행됐다. 이는 출하 싸이클과 관련이 깊다. 시장에 상품으로 나오기까지 닭은 1개월, 돼지는 1년, 소는 통상 2년 이상의 사육기간이 소요된다. 사육기간이 길면 길수록 자금 회수에 걸리는 시간도 오래 걸려 자금 회수기간이 짧은 순서대로 기업화가 진행된 셈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기업화가 진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육계산업은 2005년 말 발생한 조류독감이 산업화를 급속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5년 4분기에서 이듬해 1분기까지 발생한 조류독감 여파로 국내의 양계농가는 15만호에서 4000호로 무려 97%가 초토화됐다. 조류독감 여파로 닭고기에 대한 수요마저 줄면서 가격이 폭락하자 자금력이 부족한 개인 농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6년이 지난 현재도 3300호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닭 사육 마리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자금력에서 우위에 있던 기업들이 개인 농가의 빈자리를 메웠기 때문이다. 이 때 하림이 공격적 투자를 통해 육계 절대 강자에 올랐다. 하림은 계열사인 올품을 포함해 현재 시장점유율이 32%에 달한다. 마니커와 동우, 체리부로, 이지바이오도 10%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갖게 됐다. 5개 업체가 시장의 70% 안팎을 장악하는 과점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구제역은 양돈에서 조류독감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업계에 따르면 돈육은 지난 1990년대 초 브랜드 돈육이 출시되는 1차 구조조정을 거치며 기업화의 길로 접어 들었다. 1992년 8만호 정도이던 양돈 가구수는 구제역 이전 1만 가구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사실상 종료 단계에 들어간 지난 4월까지 6개월간 구제역은 국내 사육 돼지의 3분의 1을 살처분하게 만들었다. 돼지 값이 정부의 수입 확대에도 불구하고 급등세를 지속하고 있어 양돈 농가들은 서둘러 다시 사육에 나서려 하고 있다. 피해 농가의 90% 가량이 여전히 양돈사업을 할 의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피해 농가들은 정부의 피해 보상금을 받아 다시 사육에 나서려 한다. 하지만 보상금 지급은 절반 밖에 진행되지 않았고 속도도 빠른 편이 아니다. 외상으로 사료를 가져와 사육했던 만큼 보상금에서 사료값을 치르고 나면 자금력도 달린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비육돈을 낳는 모돈의 확보다. 이미 모돈의 값은 3배 가량 뛴 상태로 가격이 만만치 않은 데다 모돈과 모돈을 낳는 종돈(씨돼지)은 자금력이 뒷받침되는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금회수까지 최소한 1년이 걸리는 것도 냉정한 현실이다.

양돈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들 역시 구제역의 피해를 비껴가지는 못했다”면서 “기업들이 일반 농가보다는 자신들의 농가에 모돈을 먼저 공급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자금력도 달리고 모돈 확보도 여의치 않은 일반 농가가 이전처럼 양돈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정부는 이참에 내년부터 축산업 허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단위 면적당 사육두수 등을 지키고 방역시설도 갖추도록 하는 내용이다. 농가 입장에서 비용 상승요인으로 대형·기업화의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홍진호 IBK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돈육산업도 선진국 돈육산업의 수직 계열화 흐름을 따라가는 중이었다”며 “지난해 발생한 구제역은 양돈산업에 충격을 가해 결국 양돈산업이 조류독감 이후의 양계산업과 비슷한 길을 가게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닭과 돼지의 영토전쟁은 하림과 이지바이오, 사조그룹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사료에서부터 양돈과 양계, 육가공, 유통에 이르기까지 수직 계열화를 추구하면서 자체 시설투자는 물론 개인 농가와 경쟁업체들을 흡수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중소기업인 듯 보이지만 계열사 숫자만 놓고 보면 여느 재벌 기업 못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하림(136480)은 육계시장의 절대 우위를 바탕으로 수많은 M&A를 통해 돈육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특히 M&A에 적극적이었는데 지난 2009년 돈육 브랜드 선두업체인 선진과 대상팜스코를 인수하면서 돈육 시장에도 확실히 진입했다. 지난 3월말 현재 팜스코와 천하제일사료, 선진, 농수산홈쇼핑 등을 포함해 거느리고 있는 계열회사만 52개에 달하고 있다.

확장에 대한 열망은 여전해 보인다. 지난해 신명을 인수해 육계시장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고 오는 10월말 기존 육계 가공량을 60%까지 확대할 수 있는 신공장 완공을 앞두고 있다. 조류독감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자회사 올품을 통해 전국적인 양계 네트워크 구축도 구상하고 있다.



투자 규모만 1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돈육 관련 핵심 계열사인 팜스코도 올해 모돈 농장 2곳을 포함해 6〜7곳의 농장을 새로 만들고, 도축 시설도 최소한 2배 이상으로 늘리는 시설 투자를 진행, 돈육 시장 지배력을 높여갈 계획이다.

도드람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이지바이오는 사료에서 출발한 회사다. 육계와 돈육 관련 공급사슬의 상단에서 출발해 수직 계열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닭과 돼지 중 돼지에 더 강점을 갖고 있는데, `돼지는 ‘이지바이오’`라는 평을 받을 정도다. 지난 해부터 육계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하림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이지바이오는 지난해 매출 900억원대의 성화식품 인수로 육계시장에 발을 들여놨고, 특히 지난 6월에는 육계 2위 업체인 마니커를 시세의 3배에 사들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지바이오는 성화식품과 마니커 인수로 단숨에 육계시장 2위 업체가 됐다.

이지바이오(035810)가 갑자기 육계 분야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이지바이오는 지난 2005년 12월 조류독감 여파로 화의를 신청한 체리부로 지분 36%를 확보하면서 육계사업 진출을 꾀했다. 체리부로에 사료도 공급했다. 하지만 체리부로가 급속히 정상화되면서 불편한 관계가 됐다. 결국 이달 초 지분 모두를 체리부로 측에 넘기고 결별했다. 체리부로를 통한 육계산업 진출이 여의치 않자 성화식품과 마니커 인수로 돌아선 것이다.

사조그룹은 최근 눈에 띄는 행보로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사조는 2000년대 들어 해표식용유와 대림수산, 오양수산, 옹가네 등 식품기업을 잇따라 인수하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런 사조그룹이 축산업을 신성장 분야의 하나로 삼았고 주특기인 M&A를 통해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지난해 육가공 전문업체인 사조남부햄과 양돈업체인 사조농산(옛 성보농산), 대원사료를 인수해 사조아그로를 설립했고, 사조아그로는 나아가 16만평 규모의 전라남도 함평 소재 공장 1개를 매입해 가동을 시작했다.

사조그룹은 4년 뒤인 2015년 축산사업에서 2조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하림과 이지바이오가 20년에 걸쳐 이룩한 성장을 5년 만에 압축적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올해 충남소재 사료공장 1개를 사들이고, 사료회사 M&A도 추가로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양계와 도계 부문은 2015년까지 연 매출 8000억원을 목표하고 있다. 돈육에서도 4000억원을 계획하고 있다.

업계의 긴장도는 이미 높아가고 있다. 마니커는 이지바이오에 넘어가기 이전인 지난 3월말 갑작스레 적대적 M&A설에 휩싸였다. 검찰의 한형석 회장 수사 소식에 주가가 급락하던 날 지분 4.9% 정도가 특정 기업에 넘어간 일이 발생했다. 미리 수사 소식을 입수한 뒤 주가 폭락을 이용해 헐값에 지분을 사들인 게 아닐까 하는 분석이 나왔고 매입처로 사조그룹이 지목됐다. 사조그룹은 일단 부인했으나 업계는 여전히 사조그룹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사조그룹은 전라남도 지역 육가공 업체인 화인코리아를 두고도 마찰을 빚고 있다. 화인코리아는 2003년 말 부도가 난 뒤 파산절차를 밟다가 최근 회생절차로 선회하면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사조그룹은 올 초 금융권이 보유한 채권을 사들인 뒤 회생절차 부동의(不同議) 의견서를 내는 한편 경매를 신청했다. 화인코리아 측은 사조가 헐값에 회사를 인수하려 한다며 비난하고 있다.


하림과 이지바이오의 힘은 수직계열화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사조그룹 역시 이 두 기업을 모델로 삼아 대두박 수입(사조해표)→사료(사조바이오피드)→사육·도계도축(사조아그로)→2차 가공·배송·판매(사조대림)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림의 김홍국 회장은 11살 때 외할머니가 준 10마리 병아리로 오늘날 조(兆) 단위 그룹을 일궈냈다. 육계 계열화의 선두라 할 수 있는 그가 내세우는 것이 1차 농축산물에 부가가치를 만들어 2차 가공식품으로 만들고 이를 시장에 내다파는 삼장(농장·공장·시장) 통합이다. 돼지 값이 폭락해 졸지에 빚쟁이가 됐던 시절 동네가게에 진열된 소시지 값은 그대로인 것을 보고 생각해 냈다고 한다. 사료까지 직접 조달하면 더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는 생각도 덧붙였다.

하림은 삼장통합 즉, 수직계열화를 추진하면서 생산위험은 농가에 전담시켜 없앴다. 농가와의 계약을 통해 시장 상황을 봐가면서 사료가격이나 종란 매입단가를 결정하고 병아리 출하시기를 조절해 요소가격 위험도 낮췄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사료와 도축, 가공 과정을 계열화하면서 물량 공급과 관련해 시장과 교섭력도 확보했다.

양계 시장에서 살아남아 과점 대열에 낀 동우나 체리부로를 비롯한 대부분 업체들이 최소한 사료에서 도계까지의 계열화를 갖춘 상태다. 이 같은 모델이 증명된 셈이다.
홍진호 애널리스트는 “돈육과 육계업체들이 수직계열화로 나아가면서 기존에 사료만 하던 CJ 같은 대기업마저 수요처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밸류 체인상 계열화된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들은 향후 경쟁력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시장에서는 하림과 이지바이오는 육계와 돈육 시장 과점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승기를 잡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선발 업체들을 모델로 공격적인 진입을 꾀하고 있는 사조그룹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 여부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