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자문까지 공정위 제재 증거로…"준법경영 하지 말란 거냐"

by조용석 기자
2022.05.10 06:11:00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길을 찾다] 공정경쟁정책 ⑤
기업집단국 출범후 깨진 ACP…주요 사건마다 증거 등장
폭탄 전략한 CP부서…공정위내 조사·정책통 의견대치도
"ACP 존중 방향으로 공정위 내부지침·규칙 등 만들어야"
공정위 "CP부서 위축시킨단 우려 인지…개선점 살필 것"

[세종=이데일리 조용석 공지유 기자] “심사보고서 반박 PT의 상당수 자료들은 본건 조사가 시작된 이후 혹은 금융감독원 조사 전후로 회사가 그런 행위들에 대해서 적어도 조사에서 문제되는 행위에 대해서 조심하는 내용, 직원들이 그것과 관련해서 우려하는 내용 등을 바탕으로 해서 위법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취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해당 자료는) 그만큼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 부분이 있어서 더 조심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취지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증거를 바탕으로 위법성을 인정하면 앞으로 많은 기업이 컴플라이언스를 위해 사전적으로 조심하는 그런 내용이 더 제약돼 오히려 공정거래법 준수 차원에서도 역효과가 나지 않을지 우려가 됩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원회의 모습(사진 = 연합뉴스)


2020년 5월20일 공정거래위원회 과천심판정에서 열린 미래에셋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전원회의에서 피심인(제제대상)인 미래에셋 대리인의 발언이다. 준법경영이 기업 필수 경영전략으로 자리 잡으면서 공정위에 변호사-의뢰인 비밀보호제도(ACP)를 인정해 달라는 재계 요구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공정위는 오히려 뒷걸음질하는 모양새다.

한국은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일본과 함께 `유이`하게 경쟁법 집행에서 ACP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였지만, 지금은 일본마저 일부 도입하자 이제 한국은 ACP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OECD 국가가 됐다.

ACP란 변호사의 법적 자문을 받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의사교환 내용의 비밀을 보호하는 권리를 말한다. 사업자와 변호사 간에 비밀로 주고받은 통신문서(면담·전화·전자메일 등의 내용을 기록한 물건 등) 등을 처벌을 위한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기업의 CP(공정거래준수프로그램)부서 또는 같은 역할을 하는 법무팀은 대부분 변호사를 통해 법률자문을 받기에 최소한의 ACP 인정돼야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이데일리 취재를 종합하면 공정위가 그동안 불문율로 지켰던 ACP를 무시하고 법무팀이 포함된 CP부서를 가장 먼저 털기 시작한 것은 2017년 대기업 불공정거래 감시·제재를 강화하기 위해 기업집단국 설립을 즈음해서다. 당시 조사를 마친 뒤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격) 발송 후 기업이 보낸 의견서에 대한 반박 자료를 찾는다는 이유로 다시 현장조사를 나가는 등 조사절차에 대한 재계의 반발이 매우 거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공정위가 법률자문 자료를 먼저 확보하는 까닭은 기업의 우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특정 이슈가 공정거래법 등에 저촉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먼저 법률자문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공정위가 혐의를 검토하는 부분에 대해 법률자문을 받았다면 이는 제재를 위한 증거로 사용되기 쉽다. 앞서 예를 든 미래에셋 사건을 제외하고도 지난해 최태원 회장의 SK실트론 사건에서도 공정위 심사관(사무처)은 최 회장이 직접 한 로펌으로부터 받은 법률자문을 증거로 제시하며 “법 위반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공정위가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는 CP부서나 법무팀을 먼저 털어 ACP 증거를 확보하는 전략을 사용하면서 이미 몇몇 기업은 CP부서를 아예 없앴다고 한다. 준법경영을 위해 리스크 관리를 하는 CP부서는 업무 특성상 사업에 대한 우려를 업급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호받지 못하면서 사실상 ‘폭탄부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은 최근 기업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공정위는 그동안 조사대상 기업의 사업부서 위주로 법 위반행위를 조사하고 컴플라이언스 부서와는 협조적 관계를 가져왔으나, 최근 컴플라이언스 부서도 압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공정거래 영역이 주업무인 한 사내변호사는 “공정위가 최근에는 공정거래법뿐 아니라 하도급법 위반이나 대리점법 위반 사건도 본사 CP 자료를 확보해 `본사 컴플라이언스 부서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했다`는 취지로 더 세게 제재하는 경우도 자주 나온다”며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 판단을 가진 회사라면 CP업무를 당장 중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이른바 `정책통`과 `조사통` 간 알력 다툼도 감지된다. 해외 경쟁당국 동향 등에 민감한 정책통은 불문율로라도 CP부서 자료 기피 등 ACP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조사통은 현행 검찰 등 더 강력한 수사권을 행사하는 기관도 보장하지 않는 ACP를 굳이 공정위가 별도로 인정해야 하냐고 반박한다. 현재는 공정위 내 조사통 입김이 훨씬 센 셈이다.

전문가들은 ACP 보장에 대한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이를 공정거래법에 넣는 형태로 도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현행 법체계에서 검찰 등 형사 절차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ACP를 행정조사인 공정위만 법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다. 실제 검찰뿐 아니라 금감원·국세청도 ACP 자료를 타깃으로 한 조사를 많이 진행한다. 다만 공정위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방어권 보장을 위해 공정위 내부지침 또는 사건처리절차규칙 등의 형태로 ACP를 보호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사진 오른쪽)이 지난 1월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 초정 정책 강연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ACP 도입을 법적인 권리로 인정한다기보다는 기업과 공정위가 서로 협의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 문제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며 “공정위 행정조사에 관한 내부지침이나 원칙으로 정하고 협의를 하면 문제가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영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ACP 적용 자체는 공정거래 사건 절차 차원이 아닌 소송법적 차원에서 형사 절차나 증거법상 큰 맥락에서 검토가 되는 것이 맞다”면서도 “다만 ACP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공정위 내부적으로 조사절차 또는 사건처리절차 규칙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ACP를 존중하는 형태로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 역시 ACP 관련 우려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분위기다. 공정위 관계자는 “CP부서를 너무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조사가 진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외부의 지적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고 있다”며 “해당 문제뿐만 아니라 관련해 다른 개선점도 있는 지 살펴보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