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수의 경세제민]뿌리산업 없인 혁신도 없다
by신하영 기자
2022.10.13 06:15:00
[유지수 국민대 전 총장·명예교수]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주요 역할은 국민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다. 이는 곧 국가라면 경제력과 국방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아픈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시대 당시 주변 국가의 경제력·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새삼 깨닫는 것이 있다.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는 일본보다 인구가 9배 많았지만 경제력은 2배 정도밖에 크지 않았다. 일본은 상행위를 장려하는 정책을 핀 결과 경제가 활성화되고 세수가 증가하니 재정에 여유가 생겨 군사력 증강에 투자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 군함은 28척, 청나라는 11척, 우리나라는 2척에 불과했다. 국방력이 미미했던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 합병에 대책 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사농공상의 개념으로 상행위를 홀대하던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다행히도 경제 기반인 산업구조를 보면 지금의 한국은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 10대 품목은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기계, 전자, 통신기기 등으로 모두 핵심 산업분야라 할 수 있다. 이런 핵심 산업에서 모두 경쟁력을 갖춘 국가는 흔치 않다. 우리나라 10대 산업은 상부상조 구조를 갖고 있다. 한 산업이 수요를 창출하면 다른 분야까지 수요 창출 효과가 확산된다.
최근에는 10대 산업 이외에 방산산업도 부상하고 있다. 폴란드에 K2전차, K9 자주포, FA50 경전투기 겸 훈련기를 수출한 방산산업의 쾌거는 우리나라의 군사력이 그만큼 강하다 것을 방증한다. 우리나라는 10대 산업과 방산산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면서 국가경제 전체를 지지하는 단단한 구조를 갖고 있다. 자동차를 중심으로 로봇, 무인기(UAM)를 망라하는 모빌리티 산업은 기계·전자 산업이 뒷받침돼야 하는 데 다행히도 우리는 기계·전자산업에도 강점을 갖고 있다. 모빌리티산업과 방산은 인공지능(AI)과 기술집약적 반도체인 시스템 온 칩(Soc)이 필수적인데 이 분야의 생태계 또한 형성돼 있다.
새로운 분야의 산업도 성장할 것이다. 모빌리티 산업, 통신기기산업, 방산산업은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다. 이는 곧 클라우드 컴퓨팅의 수요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 400조원 규모의 클라우드 컴퓨팅 산업은 소위 FANG라고 불리는 페이스북·아마존·네플릭스·구글과 같은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 지능집약적 산업을 이끌고 있어서 경쟁하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장점은 지능집약적 기술을 활용해 최종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자동차·로봇·UAM·수소트럭을 합해 연간 1000만대 이상을 판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차·자주포·전투기 판매도 계속 성장할 것이다. 우리가 파는 제품은 빅데이터와 자율주행 같은 AI를 활용하므로 클라우드 컴퓨팅이 필수적이다. 미국보다 두뇌집단은 부족해도 수요 기반면에서는 우리가 클라우드 컴퓨팅 산업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가발과 와이셔츠를 수출하던 나라가 이제는 최고의 기술집약적 산업을 중심으로 진화한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60~70년대에는 공장에서 2교대를 마다하지 않고 일하던 서울 구로공단 여직원들의 헌신이 있었고, 80~90년대는 무역종사자의 발품이 있었다. 90년대 이후에는 엔지니어들의 피와 땀과 인내로 우리가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처럼 과거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산업인력들을 생각해서라도 정부는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특히 인력양성이 중요하다. 반도체 소재 개발인력, 설계인력, 소프트웨어(SW) 인력 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리·화학 분야의 인력도 부족하다. 반도체 정원 증원이라는 단순한 목표로는 우리나라의 진화된 산업구조를 더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정부가 정작 신경을 써야 할 분야는 반도체나 SW와 같이 화려한 분야가 아니라 그늘에서 묵묵히 적은 임금으로 일하는 전통 제조업 분야이다. SW·AI·반도체는 대기업에서 고연봉을 주는 분야이다. 대기업이라는 브랜드와 고임금이 주어지는 분야이니 명예와 돈을 다 얻을 수 있다. 세계 수준의 정보력을 가진 대한민국의 학부모가 자녀들을 이 분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금형·다이캐스팅·사출·소재개발과 같은 분야는 학부모들이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분야이다. 브랜드도 약하고 임금도 많지 않다. 따라서 정부가 반도체·SW·AI 인재 양성을 위한 노력의 몇 배 이상을 제조기반 인력양성에 써야 한다. 예를 들어 전기차 배터리는 외부충격에 강하고 열 방출이 우수한 배터리 하우징이 필요하다. 충격에 강하고 열 방출, 그리고 경량인 알루미늄을 하우징 소재로 사용하는 데 알루미늄 가공은 다이캐스팅과 같이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당연히 젊은 인력이 회피하는 분야이다. 중견·중소기업의 종업원은 상당수가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3D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기업은 상시적·항구적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고급기술로 인식 된 AI·SW·반도체와 달리 알루미늄 성형과 같은 전통적 제조 기술은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지도도 낮다. 사실은 전통제조기술도 산업기반처럼 중요한 기술인데 말이다.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 분야이기에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조·금형·용접·가공·열처리·표면처리처럼 사람들이 외면하는 제조업의 뿌리 분야에 정부가 더 투자를 해야 한다. 10대산업·방산산업 할 것 없이 뿌리산업에 인력이 없으면 이들 산업 발전은 요원하다.
조선이 몰락한 이유는 중요 현안을 뒤로하고 쓸데없는 안건에 시간·국력을 허비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권은 국력을 낭비하는 정쟁을 당장 멈춰야 한다. 산업인력의 희생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정치권이 무너뜨린다면 대대손손 비판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