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찾은 에센바흐 "현대음악, 베토벤과 다르지 않아"

by김미경 기자
2016.04.04 06:16:10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3일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서
亞 초연 진은숙·만토바니 등 현대음악 지휘
진은숙 곡 훌륭해, 감명 받아
"시차적응 안돼 힘들었지만
1300여 한국관객 또 만나 기뻐"
올 4차례 서울시향 지휘, 감독의향 예측불가
"서울시향 가치 아는 지휘자 만나야"

경남 통영시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 ‘2016 통영국제음악제’의 3일 폐막공연 지휘봉을 잡은 거장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앞서 1일 개최한 1000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스쿨콘서트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사진=통영국제음악재단).


[통영=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지난 1월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칠순 노장의 지휘봉이 허공을 가르자 관악기의 묵직함과 현란한 현악기의 음색이 교차하며 유려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급작스럽게 사퇴한 정명훈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을 대신해 이날 객석의 탄성을 이끌어낸 거장은 독일 출신의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76). 연주회를 불과 닷새 앞두고 정 전 감독 대타 지휘를 수락한 그는 한국 오케스트라와의 첫 작업에서 서울시향의 10년 내공을 이끌어내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에센바흐가 이번에는 통영국제음악제에 섰다. 3일 폐막공연에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함께 청중에게 아직 생소한 현대음악을 들고서다. 1300여개 객석을 가득 메운 경남 통영시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그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버르토크를 시작으로 작곡가 진은숙의 ‘사이렌의 침묵’과 프랑스현대음악 작곡가 브루노 만토바니의 신작 첼로협주곡을 아시아 초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날 연주회에 앞서 1일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통영은 처음”이라며 “벚꽃이 만개한 아름다운 도시에서 다시 한국 관객과 만나 기쁘다”고 운을 뗐다. 이어 “시차 적응이 안 돼 어제(31일) 리허설 때 많이 힘들었지만 호흡은 ‘베리굿’, 완벽했다”면서 연주할 현대음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의 곡은 2년 전 작곡됐고, 만토바니는 2주 반 전에 초연한 아주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진은숙의 곡에 감탄했고 감명 받았다. 어려운 곡들이긴 하지만 브람스나 베토벤의 심포니와 다르지 않다. 단지 지금 쓰여져 생소할 뿐이다. 이들 음악 안에는 이야기와 메시지로 가득하다. 이것을 관객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해석을 통해 곡의 메시지가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 하하.”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Eric-Brissaud).
◇에센바흐는 유년시절 말(言)을 잃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나치에 반기를 든 아버지(헤르베르트 링만 브레슬라우대 음악과 교수)는 전쟁에 끌려가 전사했다. 그의 나이 네 살 때였다. 6살 땐 할머니마저 난민수용소에서 잃자 그는 실어증에 시달렸다. 이모이자 양어머니가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그는 “음악은 구세주였다”고 고백했다.

에센바흐는 “지금 일흔 살이 훌쩍 넘었으니 아주 오래전 이야기”라면서 “어린 시절 아프고 힘들었지만 음악을 처음 듣는 순간 나도 음악을 하고 싶었다. 11살 때 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이끄는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에센바흐는 지난 50년간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최정상 지휘자로 명성을 쌓았다. 스위스 취리히 톤할레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휴스턴심포니를 11년간 이끌었고, 파리오케스트라와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거쳐 2010년부터 미국 워싱턴 내셔널교향악단과 케네디센터의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고령에도 여전히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하고 젊은 음악가를 발굴해 소개한다.

정상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에센바흐는 “항상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더 나은 음악, 여러 종류의 음악을 통해 나를 표현하려고 했다”면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음악만 생각한다. 여전히 화염처럼 불타오른다”고 설명했다. “좋은 지휘자는 청중에게 내 생각, 또 음악에 대한 내 해석을 자연스럽게 이해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두렵다. 때론 선생이 돼야 하고, 때론 철학자·심리학자·외교관 같다. 아울러 오케스트라와 음악가의 장점을 이끌어낼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것들이 균형을 이룰 때 좋은 지휘자가 된다.”

건강 비결을 묻자 “지휘하는 게 운동하는 것 아니냐”며 직접 일어나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일어서서 지휘하면 상체뿐 아니라 온몸을 움직이게 된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팔을 휘저으며) 지휘자는 센터, 무대의 중심에서 동작을 취하는데 이렇게 계속 움직이는 것이 나를 건강하게 만든 것 같다. 음식조절도 잘하고 스스로를 컨트롤한다.”

2007년 파리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한 뒤 지난해 8년 만에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방한한 그가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은 올 초 1월 9일 서울시향이 처음이었다. 당초 오는 7월 8일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1번’의 연주만 예정돼 있었으나, 정 전 감독의 사임 이후 본인의 일정을 조정해가며 서울시향 시즌오픈의 구원투수로 나선 것. 이날 악보를 모두 외워 ‘암보 지휘’로 화제가 된 에센바흐는 공연 직전까지 리허설을 되풀이하며 현악연주자들의 활 사용법까지 일일이 챙겼다. 이날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명연으로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서울시향과의 첫 공연에 대해 에센바흐는 “마침 중국 베이징투어 중에 연락을 받았다. 일주일 일정이었는데 시간을 조정해서 두 탕을 뛸 수 있었다”고 농을 던지며 “한 주 쉬고 싶었지만 오케스트라가 위급한 상황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며 수락 배경에 대해 귀띔했다.

이어 “서울시향과는 즐겁게 작업했다. 어려운 심포니인데 음악적 문체와 색깔, 표현에 대해 잘 이해하더라”면서 “서울시향의 가치를 알아보는 동시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지휘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오케스트라의 퀄리티는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하자 “한국은 참 뛰어나면서도 좋은 음악가들이 많은 것에 대해 축하해주고 싶다”며 “한국 음악가들과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고 웃었다.

부쩍 한국 나들이가 잦아진 에센바흐는 이날 통영일정을 마친 후 오는 7월에 이어 12월 28일, 29일에도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지휘를 또 맡는다. 올해만 서울시향과 네 차례 호흡을 맞추는 셈이다. 이쯤되자 국내 클래식계 일각에서는 공석인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자리에 그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분위기다. 다짜고짜 그에게 서울시향 예술감독 제안이 오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서울시향과 작업하면서 그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직업이다. 내 일정은 내년까지 이미 꽉 차 있다. 하지만 이후 다시 돌아와서 함께 작업하면 좋겠다.”

거장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지휘 아래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폐막연주 리허설을 하고 있다. 이날 공연에서는 진은숙의 ‘사이렌의 침묵’ 외에도 만토바니의 첼로 협주곡 ‘원스 어폰 어 타임’,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들려줬다(사진=통영국제음악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