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울어진 대한제국의 국운 석조전의 돌기둥은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by김명상 기자
2023.02.10 06:00:00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즉위 160년
조선과 서양 문물 뒤섞인 덕수궁
고종의 용기와 좌절 생생히 남아
아관파천 피난길엔 씁쓸함 여전

고종 어진.(사진=국립고궁중앙박물관)
[이데일리 김명상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 역사는 그를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인물로 자주 부각한다.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냈던 미국인 오웬 데니의 평가는 이와 다르다. 그는 고종을 매우 용감하고 현명했다고 항변한다. 데니는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었다. 청국의 하수인이었던 그가 바라본 고종은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종의 진짜 모습은 어땠을까. 덕수궁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왕과 황제로 살며 갖은 풍파를 겪은 고종의 흔적이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종의 모습을 엿보기 위해 덕수궁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다.
대한제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고종은 ‘비운’이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겨우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만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권력욕 때문에 허울뿐인 왕으로 살았다. 187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종의 친정 체제가 시작됐다. 당시 세계정세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선을 두고 벌어지는 열강들의 다툼은 망국의 위기로 다가왔다. 고종은 쇠락한 왕조의 끝자락에 서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목을 조르려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다른 열강들과 동등한 독립적인 자주 국가임을 널리 알리고자 단행한 일이었다.
대한제국 정전으로 쓰인 중화전.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이에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위엄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대한제국 정전으로 쓰인 중화전이다. 중화전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계단인 ‘답도’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른 궁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의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덕수궁의 답도에는 황제의 상징인 용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의복도 달리했다. 조선의 왕은 전통적으로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었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제의 색상인 노란색 의복으로 바꿨다. 또 중화전의 창살 역시 다른 건물과 달리 노란색으로 칠했다.

중화전 옆에 놓인 방화수를 담는 용기인 ‘드므’에도 황제의 위엄을 새겼다. 드므 옆에 한자로 만세(萬歲)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표현. 고종 이전의 조선에서는 그보다 격이 낮은 천세(千歲)를 사용했으나 모두 바뀌었다.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석조전 중앙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 그리스풍 궁전을 연상케 한다.
고종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처럼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석조전을 지었다. 대한제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이름 그대로 돌로 지은 서양식 궁전이다. 목재를 사용한 기존 건물과 달리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었는데 마치 그리스풍 궁전을 연상케 한다. 근대적 개혁에 적극적이고 서양의 문물 수용에 우호적이었던 고종이었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석조전은 중화전보다 더 일찍 지었다. 중화전은 1902년에야 건축을 시작했으나 석조전의 기초공사는 1900년도에 이미 시작됐다. 석조전을 황궁으로 사용하려던 고종의 계획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통해 대한제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길 소망했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석조전 정면에 자리한 삼각형 모양의 박공 안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궁화처럼 보이지만 오얏(자두)꽃이다. 조선 왕들의 성인 오얏나무 이(李)를 뜻하는 대한제국의 황실 상징 문장이다. 서양식 건물과 어우러진 오얏꽃 무늬는 격변하는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석조전 정면 삼각형 모양 박공 안에는 대한제국의 상징 문장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다. 서양식 건물과 어우러진 오얏꽃 무늬는 격변하는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덕수궁 후문으로 나가면 ‘고종의 길’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으로 이어지는 120m 정도의 짧은 길이다. 1896년 2월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 당시 이용했다는 길이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뜻한다.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오갈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 주변에는 가벽이 세워져 있고, 옛 건물의 오래된 사진들이 인쇄돼 있다. 이어지는 돌담길을 따라 걷다 출구를 빠져나오면 정동공원이 보인다.

계단 위에는 구 러시아 공사관이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부서져서 3층 전망탑 등 일부분만 남아 있다. 현재는 복원 작업 때문에 막으로 가려놓아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태다. 한 나라의 황제가 신변을 염려해 향했던 곳이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당시 고종이 어떤 심정으로 길을 오갔을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쓸쓸한 바람이 불어왔다. 길을 걷는 동안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월의 흐린 하늘이 암울했던 고종의 삶처럼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덕수궁 후문 고종의 길. 고종 황제는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 당시 이 길을 이용했다.
정동공원과 미국 대사관저 사이에는 중명전이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덕수궁 화재(1904년) 이후 강제 퇴위(1907년) 전까지 머무른 공간이다. 여기서 고종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중명전 내부에 들어가면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회의실 안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대신들의 얼굴을 잘 묘사한 인형들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당시 고종은 불평등 조약에 끝까지 서명하지 않으며 거부했다. 그러자 실무 책임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을 겁박했다. 그중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의 대신들은 조약 체결에 동의했고 훗날 ‘을사오적’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고종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네덜란드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비밀특사를 파견했다. 조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한 것.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 중명전.1905년 이곳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후 고종은 쓸쓸히 지냈다. 그러다 환갑의 나이에 늦둥이 딸이 태어났다. 그가 덕혜옹주였다. 고종은 말년에 얻은 딸을 각별하게 아꼈다. 석조전 옆 국내 최초의 유치원으로 알려진 준명당도 당시 지은 건물이다. 오죽하면 옹주가 다칠까 봐 150m 남짓의 등원길에 가마를 태워서 보냈을 정도였다. 준명당 앞 기단에도 옹주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 놀다가 떨어져 다칠까 봐 난간을 설치했던 자국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대한제국은 경술국치(1910년)로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다. 나라를 잃은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건강했던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에 독살설이 꼬리를 물었다. 슬픔을 넘자 그간 눌려 있던 백성들의 분노도 하늘을 찔렀다. 그의 죽음은 도화선이 되어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싹튼 민족의식은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제국의 국호를 계승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했다. 고종의 흔적을 만나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노력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