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문승관 기자
2015.08.10 03:00:00
첫 국산 자동차 '시발'
美지프 부품 모아 뚝딱
[이데일리 문승관 기자] 일제 강점기 35년은 우리 민족사적으로 커다란 치욕이었으며 경제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어려웠던 시련기였다.
8·15 광복을 맞았으나 대한민국은 오랜 기간에 걸친 식민지 정책의 폐해로 취약한 경제기반과 균형을 잃은 산업구조를 이어받은 데다 뒤이은 국토분단의 비극이 겹치면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럼에도 광복 직후 폐허로 변한 국가 경제를 다시금 일으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이어졌다. 실제로 그러한 노력은 현재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1위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내는 시금석이 됐다.
광복 직후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기까지의 1개월여 동안은 무정부상태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경제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져 국민경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그 짧은 기간에 물가가 20배 이상 급등한 상황 하나만 봐도 당시 사회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이전에만 해도 제조업은 주로 외국 원조자금에 의존했다. 이른바 ‘3백 산업’(설탕, 밀가루, 면방)등 소비재산업 위주였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제조업은 ‘퀀텀점프’의 계기를 맞았다. 이 당시 추진된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정부는 발전소, 고속도로, 항만 건설 등을 통해 사회간접자본(SOC)를 확충하고 비료, 시멘트, 정유, 제철시설 등을 건설하거나 확충함으로써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60년대 동안 제조업이 연평균 20%에 가까운 성장을 거듭하면서 한국경제를 이끌어 갔다. 산업구조의 선진화를 통해 1953년 13억달러에 머물던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 1조4495억달러로 무려 1115배나 증가했다.
김도훈 산업연구원장은 “한국이 이룬 이러한 제조업의 발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개발도상국 가운데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며 “현재도 제조업을 발전시키려는 개발도상국과 제3 세계 국가의 발전모델로 학습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장춘 박사의 잡종 배추(원예 1호)는 1960년 채소 종자가 부족하던 시절 혁신적인 품종 개량종이었다. 생산량이 적고 크기와 모양이 불균일한 재래종 배추를 중국배추와 접목해 만든 이 배추는 속이 꽉 찬 현대 김치배추의 조상이 됐다.
우 박사는 1936년 ‘배춧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 논문을 통해, 식물은 같은 종끼리만 교배할 수 있다고 알려졌던 학계에 종이 달라도 같은 속 식물을 교배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식량 산업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또 우 박사는 바이러스에 취약했던 강원도 감자를 개량하고 제주도에 감귤을 심도록 재배 기술을 연구하는 등 국내 농업 발전의 터전을 닦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현신규 박사의 ‘산림녹화 임목육종’ 기술 역시 황폐한 민둥산이었던 국내 산야를 단기간에 푸른 산림으로 변모시킨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현 박사가 개발한 리기테다 소나무는 미국에서 ‘한국에서 온 기적의 수종’으로 극찬을 받았고 지금도 미국 임목육종학 교과서에 사진이 실려 있다.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 3단 후진 1단의 트랜스미션을 얹은 최고속도 시속 80km의 ‘시발’ 자동차가 1955년 10월 12일 최초의 국산 자동차로 등록됐다. 잘못 발음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시발 자동차는 처음 시(始), 떠날 발(發)을 따 ‘첫 출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복 이후 1960년 이전은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다. 한국 전쟁 와중에 들어온 미 군용차를 재생하는 공장으로 1954년 ‘하동환공업사’와 ‘신진공업사’가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으로 참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던 55년, 거리에는 고장 나고 부서진 자동차가 줄을 이었다. 전쟁 후 우리나라는 미군 지프의 부품을 두들겨 맞춰 다시 굴러가게 하는 재생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시발을 만든 국제차량공업도 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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