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의 네마리 용` 싱가포르 세운 리콴유 前총리

by이정훈 기자
2015.03.23 06:50:17

31년간의 총리 재직..`강소국` 싱가포르 만들어
실용과 반부패 내세워..亞적 가치 사상 논란도

총리 취임 직후의 젊은 시절 리콴유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오늘날 싱가포르의 건국과 경제 기적을 일궈낸 인물이다. 자국에서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렸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도 손꼽힌다.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자국내 부정부패를 강력하게 척결한 정치인으로, 동남아시아의 작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였던 1959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31년간 총리직을 맡았던 그는 이 31년간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을 무려 30.5배가 불어난 1만2200달러까지 늘렸다.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버림받은 작은 섬을 아시아의 금융·물류 허브로 변신시켰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1인당 곡민소득은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이자 아시아 1위다. 또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국가경쟁력은 세계 2위, 국제투명성기구 조사 국가청렴도는 세계 5위이다.

1923년 9월16일 출생한 리 전 총리는 19세기 싱가포르로 이주한 부유한 중국계 가문 출신으로, 명문 래플스 중ㆍ고등학교와 래플스 대학을 거쳐 1949년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싱가포르에서 변호사가 돼 노동운동에 가담했고 우편집배원과 전화 교환원 노조 파업과 해군기지 노조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싱가포르 정치계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총리 사직후의 리콴유




1954년에는 인민행동당을 창당해 사무총장이 됐고 1959년 인민행동당이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싱가포르 영연방 자치령의 초대 총리에 올랐다. 1963년 9월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 주정부 총리를 지냈고 1965년 8월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된 이후에도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 해 11월 총리직 퇴임 직후에는 고촉통 총리 하에서 선임장관(senior minister)으로 추대됐고 2011년 5월까지 고문장관(mentor minister)을 역임했다.

리콴유는 총리 시절 유교적 철학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권위주의로 유명했고 개발독재를 펼쳐 독재자와 싱가포르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공로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연평균 경제성장률 10%를 달성하는 등 고도성장을 이뤄내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만든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부패행위조사국(CPIB)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해 공직자 부정을 엄단하는 한편 공직자 급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상해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총리에 오른 1959년 싱가포르 자치령의 1인당 국민소득은 400달러였고 실업률은 13%나 됐다.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가 섞여 툭하면 폭동과 파업이었다. 이런 국가의 수반으로서 그가 내세운 것은 실용이었다. 리 전 총리는 지난 2007년 한 인터뷰에서 “싱가포르는 원래 존재할 수 없는 나라였고 그래서 살아남는 데 필요하다면 무조건 오케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포커게임으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 탓에 도박을 혐오했지만, 2005년 “세계경제 흐름이 바뀌고 있다”며 싱가포르의 카지노산업 허가를 지지했다.

또한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반부패 척결을 내세웠다. 그 덕에 `파인(벌금) 공화국`, `태형의 나라`라는 별명도 얻었다. 인구 450만명의 작은 도시국가가 거대 미국사회의 거센 반발에도 공공기물을 파손한 미국인 청년 마이클 페이에게 기어코 곤장 6대를 때린 일화는 유명하다. 대신 그는 공무원들의 월급을 파격적으로 올렸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그의 통치철학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했고, 실제 199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 속에서도 `작은 나라의 위대한 거인`으로 불리는 그의 업적 자체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