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다한 고목나무, 새싹 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면…"

by오현주 기자
2012.09.18 07:49:22

박완서 유고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
서랍서 찾은 미공개 편지·강연록·대담 등 38편

박완서(1931~2011) 작가(사진=마음산책)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나는 1931년 식민지 시대에, 오백년 왕조시대의 수공업과 농경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다.”

마치 선언 같은 자전적 고백을 단 박완서(1931∼2011)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288쪽, 마음산책)이 출간됐다. 유고집이다. 이태 전 나온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작가의 산문집으로선 끝인 줄 알았다. 삶의 애환과 고적함으로 버무린 작가 특유의 글 뭉치가 주는 울림에 그만 만족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기대치 않은 덤이 생겼다.

생전 작가가 쓰던 노트북 바탕화면에 떠 있던 두 편의 글이 발단이 됐다. 맏딸 호원숙 씨의 눈에 띈 그 글들은 어머니의 유언이려니 가족과 지인에게 주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책에도 실린 적 없는 원고묶음이 발견된 건 1주기가 채 되지 않은 때. 책상서랍에 곱게 보관돼 있던 것이었다. 2000년 이후 강연, 대담, 편지 등 다양하게 정리된 38편은 그렇게 걸러졌다. 여든 해를 오간 작가의 기억창고에 보관돼 있던 일화와 깨달음, 감수성과 혜안, 조언과 소회가 보이고 읽힌다.

제목으로 뽑은 ‘세상에 예쁜 것’은 생전에 절친했던 화가 김점선의 병상모습이다. 2009년 김점선이 세상을 뜨기 엿새 전이던 그날 작가는 그의 어린 손주가 병실에서 잠든 걸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이내 수명 다한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마음을 바꾼다. 잠시나마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았음을 탓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을 쓴 마지막 글도 실렸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 비유한 스님이 자기만 더럽혀지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한 이기적 존재는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함부로 오염시켜도 강이 죽지 않고 살아갈 가망이 있는 건 어디선가 졸졸 흘러드는 맑은 물이 강의 임계점을 지켜주기 때문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유언으로 가름한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어디엔가 높은 정신이 살아 있어야 그 사회가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는 이치라고 생각한다.”

평생 그를 옥죄던 질곡이 있다. 상처라는 말로는 어림도 없다. 그는 전쟁통에 오빠를 잃고, 훗날 남편과 막내 외아들마저 같은 해에 앞세웠다. 역설적이게도 이 질긴 속박은 그의 문학에 태동이 됐다. 쓰고 싶다는 욕구는 스스로가 표현한 이물감처럼 서걱거렸다. 글은 질곡도 도려내고 이물감도 빼낸 칼이었다. 그래서인가. 그의 자취는 길고 또 길다.

“원고를 정리하며 눈물을 쏟았던 구절처럼 이제 어머니는 정말 멀고 신비한 곳에서 특별한 바람을 보내주시는 것 같다.” 원숙 씨의 애절한 사모가가 후기로 대신 실렸다.